햄릿은 기로에 섰다. 왕위를 앗아간 삼촌 클로디어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눈 딱 감고 차기 왕위를 이어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복수를 시작하자니 어머니 거트루드에 대한 번민이 마음을 찌르고, 모른 채 살자니 관 속에서 어떤 악몽을 꾸게 될지 감이 안 온다. 삶을 송두리째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 앞에서 햄릿은 절규한다.

 우리도 기로에 섰다. 한 쪽에서 ‘큰 틀은 변하지 않는다’며 세부 사항을 논의하려 든다. 다른 한 쪽에서는 ‘원안 자체가 폐지돼야 한다’며 논의의 테이블에 나타나지 않는다.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나 내부 구성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변화 없이 그대로 가자니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치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방황 속에서 우리는 앞 코로 흙만 파고 있다.

 비슷하다.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꼭 햄릿과 비슷하다. 처해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과 우리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나는 ‘지금 우리, 정말 비극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悲劇). 슬프고 비참한 것을 소재로 죽음, 파멸, 고뇌 등의 불행한 내용을 담은 그런 ‘극’ 말이다. 물론 이것은 며칠 전 『시학』을 다시 읽으며 생각을 바꾸기 전의 단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이래선 안 된다’하는 세 가지 기준을 세워 놓았다. 첫째, 한없이 착한 인간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비극이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극악한 인간이 불행하다 행복해지는 것도 비극이 아니다. 악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악한 인간이 행복하다 불행해져선 비극이 성립할 수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당연한 것이므로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한 인간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가? 극악한 인간이 불행하다 행복해지는가? 악한 인간이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가? 우리를 둘러싼 이 상황에 대해 나에게 자문해보면 자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물론 나는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지 잘 모르겠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착하다 또는 악하다는 의미의 굴레를 씌우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다. 저 세 가지 상황이 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비극이 아니었다. 우리의 모습이 슬프고 비참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워 놓은 세 가지 기준에 맞춰 보면 적어도 비극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대체 무엇인가? 『시학』을 다시 읽으며 그 답을 찾아본다. 비극에 대해 읽어내려 가다 한 단락에서 멈춘다. 자세히 읽어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혹시 희극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희극은 저속한 인간들의 모방이다. 저속한 인간의 특징은 여러 종류의 악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보다도 특별히 ‘우스꽝스럽다’는 것인데, 이것은 ‘추악’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남에게 고통도 주지 않고 해도 입히지 않는 어떤 실수나 추악함을 뜻한다.…(후략)
 -『시학』 제Ⅴ장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