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마르크스주의
루이 알튀세르의 세 가지 주제

 여기 자신의 한평생 과제를 마르크스에게 철학을 부여하는 것으로 설정한 한 명의 철학자가 있다. 루이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자이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다. 그가 정의하는 위대한 철학자란 ‘극한에서 사고하고 극한을 넘어서려고 감행한 사람’이다. 그만큼이나 개인사적으로 극도의 불운에 시달린 이도, 스스로 설정한 철학적 과제를 위해 다양한 사상의 극한을 뛰어넘으려 했던 이도 없을 것이다. 지난 20일 제175회 2015학년도 게르마니아가 백승욱 교수(사회학과)의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로 시작됐다.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첫 번째 시도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통해 청년 마르크스와 중년 마르크스를 구분하고자 하는 이론적인 노력이었다. 그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을 과학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과학은 과학으로서 추구되어야 하며, 이 점에선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역시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따라서 초기의 헤겔과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구분 짓자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노력이다. 그의 구호는 “마르크스로 돌아가자”였다. 물론 후기 마르크스주의로.

 오늘날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과 충돌’은 왜 일어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대립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알튀세르는 이에 대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으로부터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해 해석한다. 소망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꿈은 그 소망을 꿈속에서 동일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꿈의 여러 메커니즘을 통해 병렬적인 서사 구조를 뒤섞음으로써 자기검열한다. 이와 같이 자본과 노동이라는 모순은 ‘기본모순’으로 존재하지만 정작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등과 같은 ‘주요모순’이다. 이를 알튀세르는 ‘모순의 과잉결정’이란 말로 표현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과 노동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봐야만 한다.

 세 번째는 마르크스에게 없는 개념을 보완해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강화하려는 시도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우리의 인식은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 없는 주체는 없으며 이데올로기 없는 실천 역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없는 개념을 라캉의 ‘주체 이론’으로부터 끌어온다.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는 영원한 것이고, 인간 주체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백승욱 교수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설명하고 있다.

 “선진화 계획이 나왔다. 그렇다면 선진화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백승욱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무조건 그 의미체계로 들어가야한다. 그래야 긍정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를 통한 인식이다. 그렇다고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존재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다시 ‘주체’로 ‘호명’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은 ‘개별적’이고 ‘고유한’ 행동을 하게 된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나온 세 가지 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이 책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를 다시 이해하는데도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강의가 마무리됐다. 올해도 게르마니아의 포문이 힘차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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