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글 뱅자맹 르그랑·자크 로브
그림 장 마르크 로셰트 | 역자 이세진 | 세미콜론 | 252쪽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는 작업은 설국열차에선 힘들 듯하다. 영화 <설국열차>와 만화 『설국열차』는 기본적인 설정만 공유할 뿐 스토리 자체가 아예 다르게 진행된다. 서로 다른 결말 속에서 그 극단적인 양상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만화의 주인공 ‘퓌그’는 반대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생존 신호를 좇는 모험을 강행한다. 그러나 그는 험난한 여정의 결과물 앞에 절망한다. 수많은 희생을 뒤로하고 찾은 건 자동으로 재생되는 오디오였을 뿐이다. 영화에서 송강호(남궁민수 역)가 북극곰을 통해 슬쩍 보여준 희망에 비하면 영 찝찝하다. 맥이 탁 풀리는 결말이다.

  둘의 끝 맛은 다르지만 영화와 만화에 똑같이 등장한 설국열차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001개의 객실에 계급별로 살아가는 승객들은 열차의 시스템하에 ‘착취-복종’의 삶을 산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변하는 건 없다. 꼬리칸에서 선두칸으로 진출한 ‘프롤로프’는 <설국열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커티스’처럼 결국 열차의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던가. 프롤로프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설국열차 자체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미치광이가 된다.

  애초에 승객들의 삶은 열차 그 자체와 다름없다. 열차에서 태어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자란 그들에게 ‘균형과 안정’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선두칸 승객들은 그들이 마치 기차 그 자체인 양 자발적으로 열차의 균형과 안정을 ‘욕망’한다. 누가 위치하더라도 상관없다. 혁명가였던 꼬리칸 인물도 선두칸에선 그렇게 된다. 체스말의 움직이는 패턴이 말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듯이.

  애초에 열차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주체의 삶을 구성했기 때문에 열차의 체제를 붕괴하는 건 결국 자신의 삶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그물을 찢는 과정은 ‘죽음’이라고 표현될 만큼 어렵다. 영화와 만화에는 이를 극복한 인물이 한명씩 등장한다. 각각 다른 결말을 이끈 남궁민수와 퓌그, 이 둘을 비교한다면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둘 다 열차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그 위대함에는 차이가 있다. 애초 남궁민수는 열차 밖에서 태어났고 열차 설계에 참여한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중간중간 이전 세상을 회상하는 모습은 그가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삶에 대해 생각하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그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벽’으로 여겼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날 수 있었으리라.

  퓌그는 다르다. 설국열차에서 태어나 꼬리칸부터 선두칸을 경험하면서 철저하게 열차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사람이다. 남궁민수가 제도권의 경계에서 이데올로기를 극복했다면 퓌그는 제도권 내에서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퓌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명확한 지점을 짚기는 힘들지만 그의 아내 ‘발’이 줄곧 읽곤 했던 『역경』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순수가 사라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퓌그는 열차가 욕망하는 바가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욕망을 깨닫지 않았을까.

  방향성 없이 정해진 순환궤도를 돌던 열차가 퓌그에 의해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얼어붙은 대양을 달리는 순간, 설국열차는 위태롭지만 동시에 자유롭다. 우주를 달리는 은하철도 999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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