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느 가의 한 모퉁이> 외젠느 아제, 1857~1927
 
 흔히 연예인을 보면 ‘아우라’가 느껴진다고들 한다. 사실 아우라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쓴 미학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아우라는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이며 대상과 관찰자가 만나는 순간 소통하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이다. 아우라의 개념은 소설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에 잘 드러난다. 주인공 네로는 평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을 죽음 직전에서야 마주하는데, 그때 네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환희의 눈물을 흘린다. 네로의 내면과 작품이 조응해 아우라가 발현된 것이다.
 
 기존의 예술품은 제의가치라는 종교적 의식만을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기존의 예술품은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의 존재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예술품의 복제가 가능해지고 점차 전시가치가 주된 목적이 되면서 예술품 특유의 아우라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벤야민은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의 발전으로 복제를 통해 누구나 예술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며 제의가치가 전시가치에 전복되는 시점을 짚었다.

  초창기 사진 기술을 통해서도 아우라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진 속 모델들은 사진에 찍히기 위해 부동의 자세로 무려 8시간 동안이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진들은 모두 ‘지속성’을 지녔다. 특히 초상 사진에서 그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데 한 때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인화지에 납작하게 남아있는, 그러나 단순히 사진의 장면 속에 매몰되어 사라져 버리지 않은 한 여인의 분위기, 벤야민은 그것 또한 아우라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사진기가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주게 되자 지속성은 사라지고 ‘찰나성’이 들어섰다. 오래 앉아서 포즈를 취하던 모델의 얼굴에 그윽하게 고이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수많은 연속 동작 중 하나의 ‘찰나’만이 포착될 뿐이다. 사진 원본에서만 보이던 특유의 아우라는 찰나성에 의해 소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 사진작가 외젠느는 아제는 사진속의 인물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아우라의 붕괴를 증폭시켰다. 마지막 제의적 사진 예술인 초상 사진의 질식할 듯 한 분위기를 완전히 털어내려고 한 것이다. 왼쪽의 사진 <세느 가의 한 모퉁이>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거리를 보여준다. 사람이 전혀 없는 도시의 거리는 마치 범행 현장처럼 고요하다. 벤야민은 이 그림을 보고 ‘아제가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대상을 아우라에서 해방시키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아우라를 옹호하는지 타기하는지 애매하다고   흔히 말하는데 예컨대 이 부분이 그렇다. 벤야민이 아제를 극도로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세느 가의 한 모퉁이>는 사람이 없는 황량한 공간 덕분에 오히려 더욱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아우라는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모든 것들의 흔적이 주는 잔잔한 슬픔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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