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그것을 사실인냥 믿을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늘어지는 순간, 관객들은 영화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5분 분량의 씬(Scene)을 수십 개의 컷으로 잘게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생한 소리를 녹음하는 붐대, 배우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의 트래킹(Tracking) 조차도 영화에 드러날 수 없다. 영화예술은 자신의 존재가 허구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과 기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버드맨>은 특별하다. 이 영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가지 한 번의 편집도 없이 롱테이크(Long take)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는 편집과 디졸브(Dissolve)가 없듯이 <버드맨>은 허구의 이야기를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있는 그대로 담으려 한 듯 보인다. 영화 예술이 러닝타임 내내 영화 밖 현실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허구의 리얼리티를 확보한다면, 버드맨은 이러한 영화적 리얼리티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긴 서두를 뒤로하고 신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는 허구를 보여주지만 신문은 실제하는 현실을 지면에 담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면은 한정돼있고, 사주(社主)의 편집방향은 정해져 있다. 허구를 허구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영화와 달리 신문은 어떤 경우 실제를 실제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영화의 가치는 영화적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추구할 때 올라간다. 그렇다면 신문의 가치는 어떻게 높아질까. 비록 학보사가 학생에 의해 운영되는 미숙한 조직이라 해도 요즘과 같은 ‘시국’에 앞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직의 규모나 그 위상이 기성언론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학 사회 내에서 학보사 저널리즘이 가지고 있는 무게는 기성 못지않다. 그래서 신문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세상은 편집 없이 흘러가는데 우리가 의도적으로 어떤 사안을 디졸브하는 것은 아닌지. 적시에 플래쉬백(Flashback)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사안을 피해간 것은 아닌지.    
 
  영화는 허구라서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지만 신문은 실제라서 실제 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오롯이 담고 싶은 것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언론이야 말로 시대의 역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팩트’를 배팅하며 잔망스런 손기술로 ‘진실’을 올인 하는 것은 사기다. 적어도 대학 신문에서 만큼은 ‘타짜’이기 싫다. 기성언론이 그러하듯 난립하는 팩트 가운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짜고 치고 싶진 않다. 무엇을 걸었는지도 모르면서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하는 것이 기구한 인간의 운명이라면 나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것들을 외면하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중대신문 2년간 언론의 생리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느낀 것들이다.
 
  <버드맨>의 극단적 리얼리티는 그 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오스카 작품상을 감독에게 안겼다. 대학 신문의 ‘리얼리티’ 앞에서 나는 일류영화의 미학적 성취에 부끄러워진다. 버드맨은 영화예술의 고유한 방어체계인 컷(Cut)을 포기해 관객들을 완벽히 사로잡았다. 우리들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는가. 그것조차 자력으로 할 수 없는 ‘우리들의 리얼리티’에 오스카 시상식 전에 최악의 영화에게 주어진다는 ‘골든 라즈베리 트로피’를 수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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