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110년 전인 1905년 한 무명의 과학자에 의해 현대물리학을 뒤흔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 말단 직원인 26세의 아인슈타인은 7개월 동안 무려 5편의 위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게 된다. 훗날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 「광양자가설」을 3월 17일에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9월 27일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다섯 번째로 발표하기까지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이루어내게 된다. 이 논문들은 상대성이론, 양자론, 통계역학 등과 관련된 것으로 20세기 물리학의 진로를 완벽하게 바꾸어버린 혁명적인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EBS 과학프로그램에 1년 가까이 출연한 인연으로 10년 전, ‘기적의 해’ 100주년과 아인슈타인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2005년 ‘세계 물리의 해’에 한국물리학회 주관의 기념학술행사를 기획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인슈타인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들을 통하여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 접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놀랍게 다가왔던 것은 평생 거의 300편에 이르는 학술논문과 16편의 저서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수만 종에 이르는 학술지가 없었던 시절인 데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그리 많은 논문을 발표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약관 22세인 1901년 처음 학술논문을 게재한 이후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5편에 해당하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핵무기 반대에 서명한 편지를 러셀에게 보내고 1주일 후 세상과 이별을 고한 1955년에도(당시 76세) 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1년 노벨상을 받고 유명세를 탄 이후 30여년 동안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연구에 매진하였다. 더욱이 그의 논문은 대부분 1인 저자였고 당대 최고의 학술지에 게재되었다니 더욱 경이롭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학문연구의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위대한 논문 몇 편만 남겼으며 유명인이 된 후 연구에 매진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은 버려졌다. 흔히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자의 우수성을 논의할 때 양적인 기준과 질적인 기준에 대하여 의견이 매우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연구의 질적 우수성을 강조할 때 흔히들 아인슈타인을 그 예로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질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학자로 평가될 수 있는 특 S급 교수였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적 기능이 쇠진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우주 태초의 근본원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연구에 몰두했던 아인슈타인. 비록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때로는 예술을 즐기고 때로는 반전과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으며 그럼에도 어느 한순간도 물리학 연구를 놓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채찍질을 가하고자 한다.

한상준 교수
물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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