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Zombie)는 부두교의 주술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아이티의 부두교 무당들은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여 가사상태에 빠지게 한 후, 노예로 만들곤 했는데 이지(理智)가 없는 이들을 좀비라고 불렀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좀비가 대중문화 곳곳에서 다시 살아 돌아다니고 있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불길한 좀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 걸까.

 

▲ 일러스트 전은빈씨

인간 본능의 공격성을 해소하는 데 최적인 좀비물
사회적 관계를 파괴시켜버리는 좀비
욕망만을 좇는 좀비, 현대인의 모습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말했다. 정치사회적 삶, 즉 폴리스적인 삶을 벗어나 사는 존재는 신, 아니면 야수라고.

  좀비, ‘죽었으나 죽지 않은 인간’을 소재로 삼은 대중문화 상품은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뱀파이어가 ‘언데드’물의 대명사와 같았다면,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단연 좀비물이 언데드물, 아니 호러물 전반에 걸쳐 가장 ‘핫’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좀비물이 인기 있는 이유
  그러면 왜 좀비는 핫할까? 생각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를 알려면 좀비 영화나 게임에서 좀비 대신 에일리언이나 데몬, 몬스터 따위를 넣은 장면을 상상해 보면 된다. 불을 뿜는 입이나 크게 구부러진 뿔, 구불구불한 촉수 따위를 가진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수백, 수천마리씩 달려든다. 물론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영화라면 두어 시간 내내, 게임이라면 장면 내내 이런 식이라면 어떨까. 왠지 금방 식상해질 것이다. 반면 좀비는 초인적인 괴물보다 패턴이 단순한데도 어떤 호러물보다 짜릿함과, 중독성을 안겨준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기(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웃고 떠들고 고민하고 사랑하고 내일의 꿈을 꾸던, 우리와 똑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화든, 만화든, 좀비물의 주인공이 살아남는(또는 제일 마지막으로 죽는) 철칙은 무엇일까? 철저히 냉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주인공은 원래 여린 성격이다보니 덮쳐오는 좀비를 보고도 ‘죽여도 되나, 사람인데?’ 하며 자꾸 망설인다. 그가 ‘자초한’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는 건 주인공 버프 덕이다. <알이씨>에서 좀비로 변한 딸아이를 감싸던 엄마는 스스로도 좀비가 되어 울부짖게 될 뿐이다. <새벽의 저주>의 등장인물 안드레는 관객의 지탄을 한 몸에 받는데,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 아내를 동료들에게서 보호하고, 그녀가 좀비 아기를 낳을 때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애인, 친구, 자식이었다고 해서 머리를 날려버리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죽고, 동료들까지 위험에 빠트린다. 주인공은 살기 위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야 한다. 사람 같은 존재, 사람이었던 존재를.

인간 본능의 공격성과 좀비물
  콘라드 로렌츠는 인간의 본능에 공격성이 각인되어 있다며, 이런 공격 본능을 스포츠나 게임 등으로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전쟁과 폭력은 그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그 이론의 타당성 여부는 논란이 많지만, 대중문화 상품이 이런저런 식으로 포장된 ‘성스러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음은 틀림없다. 생각해 보자. 선량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무협물이라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판타지물이라면 세상을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하기 위하여, 서부극이라면 잔인한 야만인들에게서 가족과 재산을 지키려고, 그들은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사용하고 총을 뽑는다. 그러나 그런 살인은 대량살상이 되기 어렵고, ‘리얼’하지 않다는 점이 매력을 떨어트린다. 20세기 초반 전후로는 전쟁물이 그런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전 이래 전쟁에 대한 혐오가 일반적 정서가 되면서 다시 벽에 부딪쳤다. 이때 짠! 하며 좀비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처럼 보이는)을 수백, 수천씩 학살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지 않는가? 그리하여 좀비물의 주인공들은 신이 된다. 보이는 ‘사람’을 무차별하게(부모라도, 어린아이라도 예외는 없다), 무자비하게(머리를 부숴라!) 죽일 수 있는 신. 그들은 사회의 규범에서 ‘합법적으로’ 이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신과 같다. 좀비들이 나타나면 대형마트를 찾아라. 식량이 있고 무기로 쓸만한 것도 있으니까! 이게 ‘좀비 대응 매뉴얼’에 있지 않은가? 상품을 마음대로 골라 쓰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 자고, 마음에 드는 옷을 보이는 대로 골라 입어도 된다. 이미 법과 질서는 세상과 함께 멸망했고,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규칙만 남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좀비물이 잘 팔리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사람은 사이(間)에 존재하는 존재다. 어떤 인간을 설명하려면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등등 그가 살면서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를 거론해야 한다. 그런데 좀비물의 주인공들은 살기 위해 그런 관계의 대상을 차례차례 해치워 버린다. 그 중에는 조금 전까지 등을 맞대고 싸우던 동료도 포함된다(적들이 주인공에게 감화되며 갈수록 동료가 늘어나는 소년만화와는 정반대로, 좀비물에서는 갈수록 동료가 적으로 변하며 줄어든다). 최후에 남는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멘토로 삼을 대상이 깡그리 파괴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당수의 파괴는 자신의 손으로 행해졌다!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산물이라고 했다. 내가 명문대에 진학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이 욕망할 만한 일이라고 당대의 타자들이 지시하기 때문이며, 내가 섹시한 상대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섹시함이란 여러 세대의 타자들이 생식력과 잘 부합한다고 상상한 컨디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자가 완전히 사라진(으르릉대며 내 목젖을 물어뜯으려 발악하는 타자일지라도)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될까?

좀비가 돼가는 인간들
인간의 뇌를 갖고 인간처럼 움직인다는 점에서 좀비 역시 인간이라 본다면, 그것은 욕망이 극히 단순화된 인간일 것이다. 물어뜯어 잡아먹어버리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그런데 현대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점점 단순화시킨다. 겉으로 보면 점점 편리하고 다양한 취향을 반영한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에서 욕망이 복잡해지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구매력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다른 모든 가치를 내던지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스펙 쌓기에 투하하는 단순한 인간을 양산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온갖 과외에 짬이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점점 많은 아이들이 “돈 많이 버는 거” “편하게 사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꺼떡꺼떡 다가오는 좀비는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정리해보자. 좀비물의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인간들을 차례차례 잃거나 자기 손으로 없애버린다. 또한 그가 없애고 피해 달아나는 모든 인간은 극히 단순한 욕망만을 쫓는 최후의 인간이다. 전자는 의식적인 죽음을, 후자는 타자의 부정을 통한 무의식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분투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 죽어가고 있다. 최후의 순간, 그는 ‘전설이 된다.’ 한 가지 본능, 공격 본능만이 남은 존재(한 가지 욕망만 남는 게 아니라), 야수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공격 본능이 체계적으로 억제되고, 물질에 대한 욕망만 한껏 부풀려진 삶을 강요받는다. 그러한 삶도 인간적인 삶이다. 그런 삶에 진저리가 난, 차라리 신이거나 야수이거나 하고 싶은 사람들의 허기, 좀비물은 그런 허기를 달래 주고 있다.

함규진 교수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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