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도 호들갑스럽게 위기 경보를 내면서 정책 마련에 법석이다. 대학들 스스로도 타개책 강구에 분주하다. 그러나 대학의 위기는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그 ‘어떤 이유’에서 오고 있지 않다. 위기는 최근의 난리법석 그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부나 대학이나, 심지어 고등교육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대학의 위기를 들먹일 때 으레 학령인구 감소를 거론한다. 이제 곧 대학입학 연령 인구가 대입정원보다 적어진다고 걱정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계산해보기 어려운 예측도 아니다. 위기라는 내용도 지극히 평이하다. 대학에 입학할 학생이 부족할 테니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학생이 없으면 대학이 문을 닫게 되니 위기는 위기이다. 특히 학생 충원이 어렵게 될 대학 입장에서 보면, 대학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엄청난 위기이다. 그러나 몇몇 대학의 간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대학의 위기인가? 몇몇은 대학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모든 대학이 입학정원을 줄여야 할 것이고, 그만큼 대학들의 등록금 수입이 줄어들 것이니, 결국 대학은 운영이 어려워지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그런 ‘위기’ 사태를 타개한다면서 대학의 본연 자체를 뭉개고 있다. 아연하게도, 실효도 없을 타개책을 가지고 뭉개고 있다.

 잠재 입학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정원을 채워 살려야 할 대학이 있다면, ‘대학다운 대학’을 살려야 한다는 게 최근 정책의 상식이다. 그런 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이른바 취업률 높은 대학이고 ‘미래 유망 전공’(특히 ‘융합 전공’) 기회를 제공하는 대학이라는 게 ‘정답’이란다. 이 정답을 좇아 적지 않은 대학들이 ‘구조조정’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대학에 근원적인 위기가 오고 있다.

 대학에 취업률을 강요하는 정부 지침은 기만이다.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 경세제민의 실패를 은폐하는 기만이다. 대학의 취업률을 올리려면 무엇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책무를 다하지 못했으면 사력에 사력을 더해야 마땅하다. 마치 대학의 문제인 것처럼 말꼬리를 돌려 모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모면의 방책을 쓰고 있고, 대학은 ‘취업률 회오리’에 희생되고 있다.

 첨단의 변화에 맞추어 ‘융합인재’를 키우라거나 ‘학문 칸막이’를 없애라는 것도 천박한 소리이다. 얕게 여러 분야를 섭렵하게 한다고 융합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한 분야에 몰입하는 열정과 그것에 정통해 얻은 안목이 있어야 비로소 새로운 지평에서 창의의 융합을 그릴 수 있게 된다. 탁월한 경제학자 폴 크러그먼은 새로운 인재가 요구되고 있다는 주장 자체도 일축한다. 인재 수요라는 면에서 세상 변화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은 정말 위기에 처해 있다. 양식(良識)의 제언을 기득권 주장으로 몰며 천박한 통념에 편승하려는 ‘구조조정론’이야 말로 대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강태중 교수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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