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이 지났지만 몸도 마음도 쌀쌀하다고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학부생 김성욱입니다.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그간 나태함과 이런저런 부끄러움에 뒤늦게 안부 인사 올립니다.

 오늘은 외람되지만 제 고민을 얘기해보려 합니다. 바로 소통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소통이 중요하다’, ‘소통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합니다. 하지만 소통이 무엇인지?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이 토대에 놓여있어야 하는지를 따져들어 보지는 않습니다.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소통이 무엇이고 소통이 가능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따지고 모색하는 일은 소통의 가능성을 궁구하는데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통이란 무엇일까요? 소통을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하나의 완결된 모나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에 있어 타인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존에 있어 타인과의 교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우리의 말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선,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해를 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요? 때로는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상대에게 폭력으로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요? 서로에 대한 오해가 소통을 연결 짓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해와 오해는 서로에게 상해만을 입히는 것이 아닐까요? 과문한 저로서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물음만이 계속 맴돌 뿐입니다.

 ‘타자는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우리에게 타자의 상은 자신이 바라보고 용인할 수 있는 상으로 설정됩니다. 즉 타자의 이질성은 최대한 제거되고, 우리는 타자를 동일 자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지옥을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 걸까요? 독일의 누구 말마따나 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또는 프랑스의 누구처럼 타자를 환대해야 하는 걸까요? 타자를 초월적 존재로 이해하고 환대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나드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나드가 될 수도 없습니다. 파이어아벤트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가지 사물, 사건과 역동으로 넘쳐난다. 나무도 있고, 개도 있고, 일출(日出)도 있으며, 구름과 폭풍우, 이혼도 있다. 또 정의(正義), 아름다움,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애, 신(神), 도시와 우주 전체의 움직임도 존재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더 나아가 상세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숲 속에서 삼림 경비원이 마주친 사건과 어떤 길 잃은 사람이 겪은 일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애당초 상이한 사건들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문화권, 혹은 옛날로 가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그리스의 신들은 살아 있는 존재였다. 즉. “신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세계에 타자가 존재함을 그리고 존재해야 함을 인정하는 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노력. 지금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가능한 세계가 단 하나가 아님을 이해하고 찾아내려는 일.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우리가 수인(囚人)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감옥에서 탈옥하는 희망을 찾으려는 몸부림. 어쩌면 이러한 일들이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김성욱 학생
법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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