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

‘당당한 여성들’, 그녀들에게 던져지는 돌멩이   이창훈 학생(사회학과 3)

  금년 7월 28일 가수 현아가 새 앨범으로 돌아왔다. 제목은 ‘빨개요’. 현아는 그 어느 때보다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대중 앞에 섰고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천박하다’는 표현이 점잖게 보일 정도로 매우 강한 수준의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현아가 오로지 남성의존적인 입장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현아가 기존에 미니앨범 1집에서 발표한 ‘Bubble pop’의 가사에서도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날 바꾸려 하지 마 아니면 차라리 다른 사람 만나.(현아-Bubble Pop 가사 중)’. 현아는 스스로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섹스어필 하는 본인을 드러냈다.
 

  그리고 11월 4일, 또 다른 논란의 불씨가 지펴졌다. ‘매직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칼럼니스트 곽정은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녀는 출연한 남자 가수들에 대해 “무뚝뚝할 것만 같은데 노래를 시작하면 폭발하는 에너지에 ‘이 남자는 침대에서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에 키스 실력이 궁금한 남자” 등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었다. 그녀는 이후, 해당 발언을 들은 남성 출연자 당사자가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음을 확실히 했으며 다음과 같이 기저에 깔린 생각을 서술했다. ‘남자에게 선택받고 싶어 안달난 삶이 아니라 먼저 내 행복의 기준을 세우고 그에 합당한 남자를 선택하는 삶에 대해 말하는 일은 그자체로 벅찬 일이었다.(곽정은 블로그 글 중)’.

  섹시 여가수 현아, 섹스 칼럼니스트 곽정은 등은 무수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녀들은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성적 매력을 다루며 과감하게 ‘욕망하는 주체’로 나선다. 많은 여성들은 그처럼 당당한 여성상을 동경했으며 그녀들의 표현방식에 열광했다. 하지만 보다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가해지는 비판들의 실체이다.

  섹시 여가수나 섹스 칼럼니스트 등 과감하게 성적 매력을 어필, 성적 담론을 가시화하는 이들이 가장 자주 직면하는 비판은 바로 보수적 관점의 비판일 것이다. ‘성 상품화’에 대한 보수적 담론의 비판은 그 기반을 성 엄숙주의에 두고 있다. 신성하게 여겨져야 할 성을 외설적으로 다루고 상품화하는 여성들은 가부장제, 순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비정상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심각한 것은 가부장제와 순결 이데올로기를 공유한 사람들이 성적주체로 나선 여성들의 성을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순결하지 않은 성’이라고 판단해버린다는 점이다. 이런 속에서 성적 주체로 나선 여성들이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가수 현아의 경우 6월경 누드합성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는 사태가 벌어져 소속사에서 법적 대응에 나섰으며, 그보다 조금 앞선 4월경에는 섹스칼럼니스트 곽정은이 과거 성형 경험과 관련하여 무수한 악플에 시달린 끝에 법적대응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위의 사례들 속에서 성희롱의 가해자가 되는 이들은 ‘당당한 여성들’의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그녀들의 행위를 단지 포르노로 볼 뿐이다. 물론 이때 ‘포르노 여성들’의 성은 매우 더럽고 존중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매도된다.

 

  섹스 칼럼니스트는 본래 페미니즘 이론의 유행과 함께 등장했다. 온갖 페미니즘 담론들이 펼쳐진 결과 섹스를 둘러싼 금기들이 무너졌고, 섹스를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섹스 칼럼니스트가 등장했던 것이다. 또한 섹시 여가수에 대해서도 음악적인 반항을 통해 남성 위주의 대중문화계에 도전한다는 긍정적인 호평이 더러 존재한다. 그러나 이처럼 일정 정도 페미니즘적 속성을 띠는 ‘당당한 그녀들’에 대해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냉정한 비판을 던진다. 현대에 등장한 섹시 여가수, 섹스 칼럼니스트들은 여성임에도 ‘욕망하는 주체’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능동적으로 바꾸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욕망되는 대상에서 욕망하는 주체로 바뀌었다고 해서 권력관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현아의 노래 ‘빨개요’는 앞서 언급했듯 본인의 성적 매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특히 눈에 띄는 가사가 존재한다. ‘너만은 나를 떠나지 마 여긴 나 하나밖에 없다고. 나 지금 변해 버릴지 몰라.(현아-빨게요 가사 중)’.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현아는 결국 남성위주의 성적 욕망, 남성의 기준에 충실한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초라한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섹스 칼럼니스트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섹스 칼럼니스트 현정씨는 한 대학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 바 있다. “연애는 개인 역량의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량을 키우면 된다.(‘부대신문 6월 9일자)”. 그렇다면 그 역량의 기준은 과연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누구를 위한 기준인가? 결국 당당한 여성들이 직접 욕망하는 주체로 나선다고 해도 이미 그녀의 ‘욕망’ 자체가 기울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남성위주의 욕망에 머물러 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미 욕망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심리적인 부분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녀들의 한계는 명백하다. 섹시 여가수, 섹스 칼럼니스트 등의 여성들이 주로 다루는 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성애 중심적이며 남성의 시각에서 사고되는 성을 위주로 구성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슈를 다루는 여성들 또한 어디까지나 상품을 생산해내는 이들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핫’한 부분을 위주로 건드리는 것이다. 이렇듯 꾸준히 다루어지는 욕망 자체가 남성위주로 소비되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라면, 능동적 주체가 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목도로 말미암아 여성들이 해방을 위해 정치화되고 진정한 의미의 주체로 나설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진다. 바로 여기에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대중문화의 당당한 여성들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대중매체의 섹시 여가수, 섹스 칼럼니스트의 예를 중심으로 그녀들이 직면한 비판들을 주로 조명해 보았다. 그런데 여러 비판들을 살피다보면, 개개인의 삶의 태도에서 자기주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선 여성들이 보수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 모두의 비판에 직면하여 결국 매우 난감한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비판들의 초점을 모조리 해당 여성들에게 집중시켜 해석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한 것이다. 섹시 여가수와 섹스 칼럼니스트 등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두고 그녀들에게 가해지는 비판들을 다룬다 해도, 결국 본질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은 그녀들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반영하는 사회구조, 담론, 인식 등이다. 즉, 대중매체에서 당당한 주체로 나선 그녀들은 대중문화에서 다루어지는 성에 대한 문제의식에 불을 지피는 기폭제 역할을 할 뿐이다.

  능동적인 성적 주체로 나선 여성들이 표상하는 한국 사회, 문화의 모습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는 여성이 능동적 주체로 나서는 것에 거부감이 높은 사회라는 점이다. 섹시 여가수와 섹스 칼럼니스트, 여성 운동가 등 주체적 여성들은 각종 편견에 부딪힌다. 이는 페미니즘 행위양식을 채택하지 않은 직장 여성의 경험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미생’ 포스터를 보면 뛰어난 신입사원 ‘안영이’와 워킹맘 차장 ‘선지영’의 그림 위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눈에 띈다. “밟아보세요 선배님. 그래봤자 발만 아프실 거예요.”-안영이, “난 내 아이에게 뒷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엄마였어.”-선지영. 안영이는 ‘잘난 남자들의 찌질함’에 의해 흠이 없는 것이 곧 흠이 된다. 선지영은 가정과 일을 병행하며 홀로 힘겨워하며 결국 남편과 갈등을 빚는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여성과 슈퍼맘과 같은 여성들에게 불관용적인 사회이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다루어지는 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대중문화에서 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주요 고객층을 타겟팅하고 그에 맞추어 이슈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동성애, 트랜스젠더, 노인의 성 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한국사회가 성 담론에 있어 보수적이기 때문에 해당 주제들이 진지하게 다루어지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러한 주제들이 기본적으로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당한 그녀들’의 사고, 행위 등은 다양한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으나 결국 마주하는 것은 그녀들 당사자가 아닌 그녀들이 내재하는 복잡한 사회 구조, 제도의 맥락이었다. 따라서 이후 남겨지는 질문의 방식은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보다는 ‘그녀들이 반영하는 사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더 가깝게 된다. 예를 들어 그녀들의 행위의 정당성과 이점에 비중을 두는 입장의 경우, 그녀들이 보여준 태도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며 보다 많은 여성들이 그녀들과 같이 자유롭게 성 담론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반면 보수적 입장의 비판자들은 그녀들이 보이는 인식과 행위양식이 보편화될 경우 사회규범과 질서의 파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염려하며, 더욱 강한 규제, 규율의 적용을 주장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역할을 촉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마지막으로 급진적 페미니즘의 견해를 수용할 경우, 성적 주체로 나선 여성들이 도리어 현재 사회구조, 권력 관계의 유지와 지속의 공고화에 일조하게 되는 것에 대해 염려할 수 있다. 이 때 비판자들은 해당 여성들이 구현해내는 성의 본질과 그것이 수용되는 방식에 집중하게 되며,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구조 변화를 위해 고민한다.

  처음 시작은 대중문화에서 조명되는 ‘당당한 그녀들’에게 던져지는 무수한 돌멩이들을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돌멩이들에 집중하는 순간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에는 그녀들 당사자가 아닌 포괄적이고 복잡한 사회구조, 사회인식들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던져진 돌멩이가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 그 자리에서 비판자의 인식 준거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해 명백하게 정당한, 옳은 답을 판별해 제공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 영역이다.

사회비평 부문 당선자 이창훈 학생 interview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키워나가다

  한 때 소설가의 꿈을 꾸기도 했던 이창훈 학생(사회학과 3)은 어렸을 적부터 펜을 잡은 손에 힘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이 하나 있었다. “눈에 들어와야 읽히는 글의 특성상 상품성을 노리거나 자극적인 글이 많더라고요.” 단발성을 띤 글, 선정적인 글은 그의 마음을 불편케 했다. 비판을 위한 정교한 작업의 필요성을 그 때 깨달은 것이다.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신호’였다. 기존에 가진 나의 생각과 다른 관점을 발견하는 지점은 곧 새로운 관심이 발아하는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나와 다르다는 것이 곧 이창훈 학생에게 호기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고, 또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싶었다. 때로는 웃음을 위한 서사에서도 웃음에 가려진 ‘불편함’이 없는지 되묻곤 했다. 그리고는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중에 덩어리가 커진 생각들은 노트에 남겨두었다가 글로 옮기기도 했다.

  이번 비평도 그렇게 탄생했다. 과제를 하면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던 중 곽정은씨의 발언에 관한 논란은 여지없이 그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그가 가진 것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또다른 의견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한 그는 마침 공모전이라는 기회를 맞아 논리를 발전시켜 보기로 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생각을 심도있게 짚어보긴 어려워요.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그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찾아보며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들과 페미니스트들의 의견들을 끌어모았다.

  글은 끝을 맺었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제기에 완전한 결론이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했다. 논란 때마다 갑론을박을 하지만 결국 제 목소리 높이기로만 끝나는 상황들 역시 그러했다. “조금 더 많은 합의가 이어지고 사회문제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고민해 본다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그러려면 박차를 가하는 여럿의 의견이 교환돼야 한다는 것. 이 비평을 통해서도 독자들이 각자의 생각상자를 펼쳐볼 수 있도록 그는 기대했다. 공감과 비판의 목소리들 속에 여럿의 생각들이 교차하는 것, 그가 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다. 
                                                                           김경림 기자  kl0_0a@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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