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를 나누는 키 큰 난쟁이

오래된 책의 질감을 피부와 가슴으로 느낀다

 

정정호 교수(영어영문학과)

  지금의 모든 순간들은 세월이 흐르면 추억이 된다. 그 추억들을 머릿속에 다 담을 수 없기에 사진을 찍거나 일기를 쓰며 기억에 남긴다. 정정호 교수도 시간이 너무 흘러 이제는 역사가 돼버린 책들을 모으며 그 시절 기억들을 쌓는다. 그가 청년시절부터 모아온 낡은 서적이 벌써 100권에 달한다.

  최고(最古)의 문학작품하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디아」가 떠올려질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수메르의 고고학자들이 그것보다 더 이전에 제작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견하면서 이전 최고의 위치는 자리를 내줘야 했다. 고고학자 못지않게 정정호 교수도 각종 책의 뿌리를 발굴하러 헌책방 탐사를 떠난다.


역사를 모으다.

“요즘 사람들은 뭐든지 오래되면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쉽게 버리잖아요. 잘 간직하면 하나의 기록이 되는데 말이죠.” 퇴임을 두 달 앞둔 백발의 교수는 대학원 시절부터 오래된 책을 모으고 있다. 해방 직후의 국어참고서부터 19세기에 출간된 영어사전까지, 그 시절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의 집안 서재에는 고서들이 나라별로 나란히 줄지어 서있다. 개중에는 1950년대에 나온 시집 「빠이론」도 있고 중앙대 교지 「녹지」와 「중앙문화」의 창간호도 있다. 거기다 1958년 소설가 이광수의 「문학과 평론」까지 있으니 역사 도서관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가 오래된 서적을 찾을 때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한국 서적의 경우 최소 개화기 이후이어야 하며 최대 1950년대 이전이어야 한다. 1950년 이후에 만들어진 책은 고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며 개화기 이전은 한문으로 쓰여 있어 읽기에 까다롭기 때문이다. 외국 서적의 경우는 최소한 100년은 넘어야 그에게 오래됐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오래된 향취를 찾아서

정정호 교수는 오래된 서적을 구할 때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그만의 철칙이다. 요즘 같은 스마트 시대에 집안에서 편하게 앉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간단한 것을 그는 꼭 발품을 팔아 오래된 서적을 찾아야 직성이 풀린다. 사람도 다 다르게 생겼듯 책도 그만의 특징이 있어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직접 헌책방에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마다 질감부터 냄새까지 모두 천차만별이죠. 저는 책을 살 때 꼭 냄새도 맡아보고 몸에도 대봐요.” 책도 하나의 신체라 생각하는 그는 책을 고를 때 내용뿐 아니라 종이의 촉감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주말마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오래된 책을 찾는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평화시장을 기점으로 헌책방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서 있다. 대형서점과는 달리 길가에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일이 뒤져봐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 속에서 가치 있는 고서를 발견하는 날에는 그는 온종일 기분이 좋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티를 내면 안 된다. “가격을 물어볼 땐 흥미 없는 척 물어봐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상인들이 귀한 건 줄 알고 값을 높게 부르거든요.” 그는 항상 헌책방에 갈 때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한 표정으로 들어간다.
  그의 오래된 책 발굴은 한국을 떠나서도 계속 이어진다. 외국을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단골 헌책방을 만드는 것이다. 1983년도 영국 유학시절 여느 때와 같이 그는 헌책방에서 오래된 서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눈길을 잡은 것은 1815년에 출간된 영어사전이었다. 200년 가까이 된 책을 발견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30파운드나 되는 가격에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정정호 교수는 누가 그 책을 살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결국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을 샀다.
  너무 희귀해서 구하지 못하는 경우 그는 복사를 해서라도 원하는 책을 꼭 손에 얻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작품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지금도 그가 가장 구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현재 「천로역정」은 국내에 서너 권만 존재한다. 정정호 교수는 숭실대 도서관에 비치된 「천로역정」을 제본하면서 구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책은 삶의 지침서

50년대 시집을 읽거나 200년도 넘은 소설을 읽으며 그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책은 그 시대만의 역사와 사상이 담긴 보물이죠. 책을 읽다 보면 그때의 분위기와 향취에 끌리기도 해요.” 그는 오래된 책을 읽으며 지금 시대에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정정호 교수는 오래된 서적을 읽으며 지식의 키가 한 뼘 더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고서들은 시야를 넓혀주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난쟁이죠. 책을 읽는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넓은 세상을 보는 것과 같아요.” 그는 오늘도 오래된 책을 읽으며 자신이 깨닫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
 

책과 대화하다
 

  그는 고서를 통해 그 시대를 산 작가와 소통한다. “책에는 작가의 영혼이 담겨 있어요. 어떻게 보면 책은 살아있는 물건이라 할 수 있죠.” 이 세상에 없는 작가라도 그는 책을 읽으며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연관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책을 읽고 나면 뒷면에 감상문을 쓰죠.” 그는 고서들을 읽으며 그 시절을 상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만의 생각을 새기기도 한다. 오래된 서적도 그의 손을 거치면 일기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추억하고 싶을 때마다 과거에 쓴 글을 보면서 피식 웃을 때도 있고 스스로 감탄할 때도 있다.
  워낙 오래된 것이다 보니 문장의 쓰임이 현재와 다르기도 하고 약간의 오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당시만의 특별함을 느낀다. “지금이랑 말의 쓰임이 다르면 좀 어때요? 비교가 되면서 읽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죠.”

퇴임이 설레는 이유

  정정호 교수가 수집한 오래된 책들엔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그는 1955년에 출간된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 창간호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 깊은 만큼 「현대문학」 창간호에 대한 그의 소중함도 크다. 「현대문학」의 사장마저도 정정호 교수가 가진 창간호를 탐내기도 했다. 그 사장이 가진 창간호는 낙서도 많이 돼 있고 낡은 반면 정정호 교수의 것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간절한 사장의 부탁에도 그는 거절하며 자신의 창간호를 지켰다.

  「아버님春園」 초판본도 정정호 교수의 보물이다. 「아버님春園」은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가 북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1955년에 쓴 책이다. 이 책을 애지중지 소장해오던 중 2011년, 춘원 이광수 학술대회에 그 딸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바로 그 책을 챙겨 학술대회로 갔고 후에 그곳에서 만난 이정화에게 자신이 가진 「아버님春園」 보여줬다. 그녀는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보고 굉장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퇴임하지만 앞으로 또 다른 길이 열려 설레는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임한다고 아쉽냐며 물어보는데 저는 정말 좋아요. 여유가 생긴 만큼 자유롭게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오래된 책을 찾을 거예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연구와 강의로 시간에 쫓겼던 그는 앞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가롭게 헌책방을 거닐 수 있어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정정호 교수는 앞으로 찾지 못한 오래된 보물들을 쉬지 않고 계속 발굴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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