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공부하기가 어렵다. 옛 언어를 배워야하고, 단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자 하지만 고전문학이나 고어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뿐더러 단순한 내용이다. 특히 외국문학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된다. 누구나가 잘 닦여진 길로 달려가고 싶고 쉽게 정보를 취득하여 활용하고 싶다. 하지만 쉽게 얻은 답은 깊이가 없고 단편적이며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어서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스스로 찾고 얻은 답은 내공이 된다.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일본의 유명한 시인인 마쓰오 바쇼는 다도(茶道)에서, 시(詩)에서, 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은 만류귀종(萬流歸宗)으로 동일한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 그는 시를 통해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바쇼는 엣 선인들이 행했던 방법대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시에서도 꿈속의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자신의 모습을 읊었을 정도로 평생을 여행으로 보냈다. 당시의 여행은 오늘날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걸어야 했으며 잠잘 곳과 먹을 것도 확보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노숙을 하고 강도를 만나는 위험한 산길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다섯 번이나 길고 긴 여행을 했다. 바쇼는 선인들의 여행을 따라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보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웠으며, 인간의 가치와 본질을 발견하였다.

  소동파는 <어잠 스님의 녹균헌>이란 시에서 대나무를 선비의 절조생활에 비유하였다. ‘밥상에 고기반찬이 없을지언정, 사는 집에 대나무가 없을 수 없네. 고기 먹지 않으면 사람이 여윌 것이고,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저속하게 한다네. 사람이 여위는 것은 살찌게 할 수 있지만, 속된 선비는 고칠 수가 없어라. 남들이 이 말을 듣고, 고상한 체하면서 도리어 어리석다고 웃지만, 만약 대나무를 대하고 고기도 씹어 먹을 수 있다면, 세간에 어찌 양주학 얘기가 있으리오.’

  우리는 잘사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기준으로만 재단하고 있다. 본질과 가치에 대한 것은 저쪽 산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소동파는 중요한 것은 오히려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소유하고자 하면 버려야 한다. 기부하고 나누는 자발적 가난이 필요하다. 그 결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엣 선인들의 사유와 철학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다.

  정신적 풍요보다 물질적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시대, 첨단 기술로 재빠르게 변화하고 적응이 요구되는 현대, 즉각적이며 감각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고전이 답을 하고 있다. 삶의 본질과 인간의 가치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고독과 외로움을 친구로 삼으라고 한다. 오랫동안 찾고 고민하고 발버둥 치라고 가르쳐준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라고 한다. 그러면 정신적 풍요로움, 경제적 자족이라는 균형을 유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임찬수 교수
아시아문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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