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이 한 토막의 구절에서 ‘누군가의 아버지가 우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이건 ‘스투디움(Studium)’이다. 대신 ‘이전에 보았던 고뇌와 걱정으로 가득한 내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하다면 그건 ‘푼크툼(Punctum)’이다. 사진을 해석하는 데 쓰이는 개념인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잠시 빌려 기자는 기자의 본분에 대해 잠시 고민해본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이란 사진을 보았을 때 지식이나 관습에 따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영역이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푼크툼은 사진으로 일어나는 상처, 아픔 또는 주관적인 강렬한 마음이다. 이는 우연히 그러나 빠르게 다가와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우리 엄마도 어릴 때가 있었구나. 이때는 고무줄놀이가 유행했네’라고 생각한다면 스투디움이다. 대신 어린 엄마의 생기있는 눈망울이 엄마 눈가의 주름을 떠올리게 해 괜히 울적하다면 이때 당신의 마음을 할퀴고 간 엄마의 ‘눈’이 바로 푼크툼이다.

  ‘객관적 정보냐 주관적 분위기냐’가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큰 차이점이지만 기자가 생각하는 또 다른 차이점은 ‘누가 다가가느냐’다. 스투디움은 지식이기 때문에 보는 이가 먼저 다가가야 하지만 푼크툼에선 작품이 보는 이를 엄습한다. 화살처럼 날아가 보는 이의 마음에 쑥 꽂히는 것, 작품이란 자고로 그래야 하는데 … 기자는 기자의 기사가 스투디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번학기, 기자는 굵직한 사건은 다 맡아봤다. 학문단위 구조개편 기사도 총학생회 선거 기사도 써봤다. 구조개편 의견 수렴일이 연장되니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해보자는 마음으로, 총학생회 선거가 다가오니 팍팍 투표하자는 마음으로 기사를 썼다. 그러나 부족했다. 기사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면 또는 다가가서 마음을 할퀴었다면 지금의 결과는 조금 달랐을지 모른다.

  서울캠에서 구조개편 설명회가 열린 지난달 21일. 기자는 기대했다. 전날 있었던 안성캠 구조개편 설명회에 250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기에 서울캠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00명도 채 오지 않은 강당은 싸늘했다. 무관심한 학생과 교수들이 미웠다. 이번 구조개편에서 마음 놓을 수 있는 학문단위는 어디인가? 그 어디도 편히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학생대표자 선거도 마찬가지다. 특히 인문대는 지난 1년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됐다. 비대위 체제를 깨겠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이 많이 투표하겠지. 그런데 웬걸. 투표율이 50%에 조금 못 미쳐 선거가 무산됐다. 다음주쯤부터 재선거를 한다고 하지만 걱정스럽다. 또다시 투표율이 낮아 선거가 성사되지 못한다면? 내년에도 인문대는 비대위가 이끌어가야 하는가.

  작금의 현실을 보며 기자는 반성한다. 보는 이에게 먼저 다가가는 매혹적인 기사를 쓰지 못 했다는 점, 뇌리에 선명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는 점, 그랬기 때문에 주요 사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 … 그리고 생각한다. ‘자, 약속해. 앞으로 네 기사에 푼크툼을 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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