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국 앵커(외국어교육학과 80학번)
  • 이승재 기자
  • 승인 2014.11.24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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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사리지 않는 취재로 최고의 특종을 발굴하다

  차별화된 방송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취재. MBC를 대표하는 앵커 정연국 동문은 평범한 기사를 특종으로 빚어낸다. 1987년 MBC에 입사해 취재센터장에 오른 오늘날까지도 시청자들에게 생생한 기사를 전달하려는 그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최고의 방송을 위해 두 발로 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정연국 동문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 사진 박가현 기자

 

위장취재 마다 않고 두발로 뛰던 젊은 기자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는 미덕을 깨우치다

 

  <100분 토론>이 시작하는 화요일 밤 12시 20분. TV를 켜면 11번 채널에서 정연국 동문이 출연한다. 진행자인 그의 매끄러운 진행에 힘 입어 <100분 토론> 패널들은 열띤 설전을 펼친다. 토론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그 현장의 중심엔 정연국 동문이 자리했다. 지난 6월 독특한 선거방송으로 방송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그를 만나봤다.


-선거방송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던데.
“사람들이 3사 방송국 중에서 선거방송을 가장 잘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6·4 지방선거를 맞아 올해 초부터 <선택 2014>의 선거방송기획단장으로 근무한 보람을 느꼈어요. 선거방송하면 정형적이고 지루한 이미지가 떠오르잖아요. 선거방송일지라도 젊고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정보와 재미를 고루 갖춘 선거방송 <선택 2014>을 기획했던 이유에요. 당선 확률을 정확하게 예측해내는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마술과 예능을 활용한 3차원 그래픽을 선보였죠.”


-지방선거가 끝나고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게 됐다.
“<100분 토론>으로 정통 토론 프로그램이 가진 힘을 보여주고 싶어요. 예전부터 예능 위주의 토론 프로그램들이 성행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100분 토론>은 만들어진 지 15년이나 된 MBC의 대표 토론 프로그램이에요. 토론 프로그램다운 방송이 없는 요즘 사명감이 더 막중할 수밖에 없죠.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진행을 맡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100분 토론> 진행을 위해 개인적으로 공부도 하고 있어요.”


-<100분 토론> 진행과 함께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있나.
“지난 7월 보도국 취재센터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현재 250명에 달하는 기자들의 전반적인 취재를 총괄하고 있죠.”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총괄하는가.
“부장기자들이 보고한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취사선택해요. 그리고 기사의 방향을 지시하죠. 취재센터장이 되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분야의 기사들을 다뤄야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담당하는 분야의 기사만 보면 됐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조금 부담되는 면이 있긴 해요. 예민한 기사의 경우에는 더욱 어렵고요. 옛날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어요.(웃음)”


-처음 MBC에 입사했던 당시를 기억하는지.
“왜 기억이 안 나겠어요. 86년도에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의 여러 방송국 공채기자 모집에 몇 차례 도전했었어요. 아쉽게도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죠. 지친 심신을 달랠 겸 87년도에 고향인 울산을 찾았어요. 우연히 울산 MBC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죠.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한번 지원해봤는데 신기하게도 제가 합격한 거예요. 꿈꿔 왔던 기자가 됐다는 생각에 정말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울산 MBC에 애정이 깊어 보이는데.
“울산 MBC에서 기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말단 기자로 시작했지만 신입기자답지 않게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거든요.”


-어떤 경험을 했던 건가.
“검찰, 경찰, 시청, 항만청, 세무서 등 다양한 출입처를 다녔어요. 경찰서만 출입하는 서울 방송국의 신입기자와는 확연히 달랐죠. 기자의 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던 터라 여러 분야를 취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자로서의 눈을 키우는 좋은 기회였어요. 게다가 생방송 출연의 기회도 많았어요. 서울 기자들에겐 생방송의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데 비해 지방에 있던 저는 생방송에 자주 설 수 있었거든요. 앵커로 불렸던 것도 이때부터에요. 울산 MBC에서 8년을 근무하며 대략 5년 정도를 <로컬 아침뉴스> 앵커,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동했죠.”


-생방송에 상당한 훈련이 됐겠다.
“생방송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생겼어요. 다른 기자들보다 생방송을 많이 접했던 경험이 앵커로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지방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다 보니 경력 공채를 통해 서울 MBC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생방송에 관련해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죠. 기자를 꿈꾸는 후배들도 굳이 서울만 고집할 필요가 없어요. 지방을 거쳐 서울로 오는 방법도 고려할만 하거든요.”


-그 시절에는 경력 공채가 잦은 편이었나.
“예전에는 지금보다 경력 공채를 뽑는 경우가 더 드물었죠. 전통적으로 한국 방송계는 신입 공채를 선호하나 봐요.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반면 외국 방송계는 경력 공채를 선호해요. 신입사원 채용엔 상당한 교육비가 발생하고 신입을 현장에 바로 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으로 한국 지상파 방송의 기자 채용 시스템도 외국처럼 바뀌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처음 맡았던 취재를 기억하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아요. 기억날 만도 하지만 27년 동안 수많은 프로그램을 거쳤는지라 가물가물하네요. 아, 유독 기억에 남는 취재가 있긴 해요.”


-서둘러 말해 달라.
“<카메라 출동>의 기자로 활동했던 96년도였을 거예요. 당시 지하철 소매치기가 극성이란 이야기가 돌고 있었죠.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지갑이나 귀중품을 훔쳐 간다고 하더군요. 사건을 심층적으로 파헤쳐보기로 했어요. 생생한 취재를 위해 위장취재란 방법을 택했죠. 한번 지하철 1호선에서 살다시피 지내보세요. 유심히 사람을 보고 있으니 그가 소매치기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더라고요.”


-위장취재의 과정이 궁금한데.
“자연스러운 연기가 관건인 취재였어요. 돈 많은 취객인 척 컨셉을 잡았죠. 도둑들이 지갑을 만져보고 얇으면 그냥 가버리거든요. 지갑 안에 신문지를 두툼하게 넣고 온몸에 소주를 뿌린 채 지하철에 올랐어요. 그리고는 막차가 끊길 때까지 내내 자는 연기를 선보여야 했어요. 촬영기자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죠. 도둑들이 제 몸을 더듬는 게 느껴지더라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고요. 범인들이 지갑을 갖고 완전히 꽁무니를 감출 때까지 자는 척을 해야 했기에 눈을 뜰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취재지만 당시에는 정말 진지하게 취재에 임했어요. 간혹 도둑들이 출몰하더라도 원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몰래 담기 어려웠거든요.”


-어떤 장면을 포착하고 싶었나.
“도둑의 손이 제 옷 안에서 정확하게 지갑을 빼가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어요. 한 달여 만에 원하던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했죠. 취재가 끝나고 ‘내가 봐도 정말 대박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종이었던 거죠. 지금까지 저의 기자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사예요.”


-그동안 발 벗고 취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07년 런던 특파원으로 가게 된 건가.
“그런 셈이에요. 요령 피우지 않고 성실히 취재를 하며 다수의 특종을 건져 내는 기자들 가운데 특파원을 선발하거든요. 뛰어난 능력을 보인 기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포상이죠. 특파원 자격으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모든 기자들의 꿈이에요.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결 여유를 즐기며 지낼 수 있었어요. 국내에 있을 때에 비해 일이 많지 않아 기자들 사이에선 휴식기라고도 불리죠. 저보다 아내가 더 좋아했어요. 영어를 사용하는 런던에서 아이들이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한국으로 돌아올 시기가 가까워지니 가족 모두가 아쉬워했어요.”


-외국에서의 취재는 어떠하던가.
“3년간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국내에서 다루지 못했던 다양한 국제 사안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주로 국내 사안들을 취재했잖아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까지 담당하여 취재했던 색다른 경험이었죠. 제가 현지에서 이스라엘-가자 전쟁과 파키스탄 부토 전 총리의 암살 사건을 취재했다면 믿으시겠어요?(웃음)”


-기자 생활을 하며 어려운 시기는 없었는지.
“평기자로 있었을 때나 지금이나 취재에서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오히려 취재는 제게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죠. 하지만 부서를 책임지는 입장이 되고 나니 또 다르더라고요. 데스크에서의 판단과 취재기자의 주장이 엇갈릴 때 후배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워요. 기사의 가치와 방향을 판단함에 있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데도 말이에요. 후배들과 개인적인 의견 충돌은 없었지만 2012년 MBC 노조의 장기 파업으로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긴 것이 늘 가슴 아파요.”


-명확한 가치관이 있는 것 같다.
“‘중도를 지키는 편향되지 않음’이 기자로서 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간혹 방송에서 사견을 드러내는 아나운서나 앵커들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저도 소신이 담긴 발언을 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몇 마디 클로징 멘트를 던졌던 과거가 있죠.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 언론인은 중도를 지키는 게 맞겠다고 생각되라고요. 상대와 의견이 다름을 피력하다 보면 갈등과 분쟁은 면할 수 없어요. 방송을 진행하는 입장이라면 시청자들이 오롯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객관적인 시각을 전달해야 한다고 봐요.”

  언론인으로서 중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정연국 동문. 그는 어린 시절 들판에서 공을 차며 놀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때 축구선수를 꿈꾸기도 했다는 그의 추억 속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어린 시절 꿈이 무엇이었나.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 또래의 남자 애들이 대부분 축구를 좋아하잖아요. 학교가 끝나고 나면 하루 종일 친구들과 공을 차곤 했죠.”


-축구 실력이 훌륭했던 편이었나.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니 실력이 괜찮았던 게 아닐까요.(웃음)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선수로 뛰었어요. 맹연습을 하던 어느 여름날 제가 정신을 잃고 졸도하지만 않았다면 축구선수가 됐을 지도 몰라요.”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나.
“울산시 울주군의 까마득한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전기도 버스도 없는 산골이라 들판을 벗삼아 지냈죠. 초등학교 3학년 때 울산 시내로 이사를 왔는데 신기한 물건이 참 많았어요.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탓에 모든 것이 새로웠죠. 축구선수 활동을 중단하고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하고자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서울로 전학을 간다는 것은 제게 일종의 유학이었죠.”


-기자라는 꿈은 어떻게 갖게 된 건가.
“구로구 독산동에 이사를 오고 친한 동네 친구들이 생겼어요. 친구들이 대학에 가니까 학보사 기자를 하더라고요. 기자로 활동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어요. 제가 8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 것도 있죠. 80년대에는 민주화 바람이 거셌어요. 1,2학년 때는 매일 같이 반독재 데모를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어요. 학우들과 함께 시국에 대한 고민을 했죠. 권력의 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자를 준비하게 됐어요.”


-학교 생활에 열심인 학생이었는지.
“군대 가기 전과 후로 제 학교 생활이 나뉘는 것 같아요. 1,2학년 때는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때문에 데모를 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주도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꽤 자주 참여를 하는 편이었죠. 상대적으로 공부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단골 식당에 장부를 달아놓고 다닐 정도로 술도 많이 먹었죠. 군대를 다녀오고는 학과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꾸준히 공부를 한 결과 대체로 좋은 학점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학과 세부전공으로 독일어를 공부한 것이 기자 활동에 도움이 됐나.
“기자 생활에 큰 도움은 못 됐던 것 같아요. 졸업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걸요. 학부생 시절에는 독일어를 어느 정도 하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까먹었어요. 그래도 독일어를 전공했던 만큼 독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친숙하긴 하죠. 2002년 회사에서 연수를 보내줬을 때도 독일을 선택했어요. 독일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독일어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어요.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문제가 없어 가족들과 함께 유럽 각국으로 여행을 다녔어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진학한 배경은.
“평소 현장이나 취재 경험은 많지만 이론적 배경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저널리즘 이론을 배워 실무와 접목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시사매거진 2580>에서 근무했을 당시에 야간 시간을 활용해 대학원 공부를 한 거죠. 매일 취재를 나가야 하는 부서가 아니어서 시간적 여유가 다소 있었거든요. 이론이 취재 활동의 실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게 지금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학부생 시절 기억에 남는 교수님이 있다면.
“독일 문학을 가르치셨던 이병우 교수님 생각이 나네요. 제자 사랑이 참 각별하셨어요.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셨던 분이었죠.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나눠 줄 프린트물을 챙겨 오시는데 교수님의 학구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다들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됐어요. 다른 수업에서라면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도 이병우 교수님의 목소리는 경청했죠. 헝클어진 백발의 모습에 담배를 피우며 강의하시던 교수님이 많이 그립네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데모에 대한 기억, 자주 찾았던 단골 식당에 대한 향수, 그리고 교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곳이에요. 학교를 떠난 지 벌써 30여년이 지났네요. 학창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이 있어요. 최근엔 언론계에 먼저 나가 있는 선배로서 후배들을 끌어줘야 하는 책임감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사회에서 선배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선배들이 모범을 보여야 후배들도 그 모습을 본받아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던 기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이 중앙인으로서 저의 목표입니다.”


방송기자와 앵커 그리고 아나운서의 차이가 궁금하다

“다양한 취재를 거치며 연륜이 쌓인 방송기자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서 기사의 가치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부적으로 선발한 한 명을 앵커라고 불러요. 앵커는 <뉴스데스크>, <뉴스투데이> 같은 밤의 메인 뉴스를 진행하게 되죠. 낮에 방송되는 짧은 뉴스는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들까지 보통 앵커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정확히는 진행자라고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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