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을 대학생활에서 보다 많은 견문을 넓히고자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은 매우 친숙한 나라 중 하나이다. 여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인 ‘스미마셍’에 대해 언급해보기로 한다.

  일본어로 ‘すみません(스미마셍)’은 사전적으로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또는 ‘부탁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필자의 4년 남짓한 일본 경험에 의하면 주로 무엇인가 물어볼 때나 타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입에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표현으로 기억된다. 문관(文官) 중심이었던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예로부터 성(城)을 소유한 성주(城主)를 중심으로 강력한 무신(武臣)집권 체제를 유지해 온 나라였다. 일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칼을 찬 무사 ‘사무라이’는 그 시대를 잘 반영하는 예이다. 하지만, 이런 사무라이가 현대 사회 도심이나 매일 타는 지하철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인물이라 가정하면, 영화에서 느끼던 흥미로움 따위는 고사하고 적어도 평소처럼 이리 밀리고 저리 부딪히는 상대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그 단단하고 날선 물건이 어떤 형태로든 내 몸에 와 닿는 것이 싫기 때문이 아닐까? 무사들이 득실대던 과거에 거리를 걷다가 칼을 찬 그들과 자칫 몸이라도 스치게 되면 시비를 가리기보다 우선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던 시대적 배경에서 유래된 습관적 표현이 ‘스미마셍’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적지 않은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 직접 들었던 이 ‘스미마셍’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그전까지 일본의 최대 장점이라 여겼던 몸에 배어 있는 상대 배려의 미덕이라는 필자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살벌한 배경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배려 혹은 기피의 문화가 일본의 ‘스미마셍’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가? 두말하면 잔소리라 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예의범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으며, 이런 배경을 통해서도 한국의 ‘스미마셍’은 그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존중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의 문학가 주제 사라마구는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그의 대표작 ‘Blindness’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현실의 세태를 따끔하게 지적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지 않을 뿐’. 서울 시내 모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좁은 오르막길을 따라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걸어 올라가는 환자를 두고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의사들이 길을 비키지 않자 오히려 몸이 불편한 환자가 위험한 차도로 내려가 길을 내어주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들에게는 환자가 보이지 않았을까? 실적 위주의 전문교육에 대한 회의와 반성에 맞물려 교육과정에 인문학 도입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는 시대적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올바르게 대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 중앙대학교 가족들 모두의 마음속에 뜨거운 인간애(愛)와 자발적인 ‘스미마셍’이 녹아있기를 기대해본다.

고재홍 교수

의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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