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켜켜이 쌓인 카페인 깡통들, ‘츄리닝’에 슬리퍼, 찌들어가는 금요일 신문사의 흔적도 이제 2주면 안녕이다. 사실 밤샘작업을 좀 더 묘사하자면 ‘날 것’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얼굴을 덮은 파운데이션은 거의 반쯤 날아간 상태가 되고, 아이라이너는 번질 대로 번져 눈 밑의 검은 다크서클이 된다. 세안이 필요한 순간이다.

  하루 종일 피부를 덮고 있던 화장기를 물로 뽀독뽀독 씻어낼 때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제야 피부가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쌩얼’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모든 게 드러난 것처럼 민망하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메이크업 아래로 비치는 맨얼굴의 잡티를 가리고 싶어지는 것이 욕심이다. 때 아닌 쌩얼의 중요성을 설파하려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주간 모멸감 기획을 준비하며 보았던 이십 대의 맨얼굴에 대한 이야기다.

  감정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는 말이었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무작정 굶기를 시작했던 어떤 이는 눈물에 젖은 샐러드를 먹으며 불현 듯 저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 기업 인턴을 하던 어떤 이는 상사들의 성적 농담에 장단을 맞춰야 할 때 비슷한 생각이 요동을 친다고 했다.

  어디 하나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상대적 박탈감에 한 번, 또 갑의 폭정에 한 번, 그렇게 이십 대는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부끄러웠던 실수와 실패의 기억은 젊음이라는 이름하에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는 힘들다. 모멸이라는 감정이 젊음들의 자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생기를 머금던 가면 사이로 드러난 것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이십 대의 맨얼굴이었다.

  또 어떤 모습은 솔직하기도 했다. 전화상담 알바를 하던 어떤 이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욕을 듣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자 순간 머리에 이런 생각이 번뜩였다고 한다. ‘참을성이 좋아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식으로 자기소개서에 써야 겠다.’ 이윽고 북받치는 설움에 잠겼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기자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취업 앞에 강한 인상과 거창한 이미지를 풍겨야 할 것 같은, 소위 ‘자소설’에 대한 강박은 비단 기자와 이 사람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가공된 현실이 스펙이 되고 경쟁력이 될 때 내 자신이 종이 한 장보다 가벼워짐을 느낀다.

  마지막 이십 대의 모습은 악에 받친 얼굴이었다. 의태어로 표현하자면 흔히들 말하는 ‘부들부들’의 상태다. 당한 설움과 모욕에 악다구니가 남은 것이다. 혹자는 남보다 잘 살겠다는 일념으로, 혹자는 다시 되갚아주겠다며 설욕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멸이 또 다른 모멸을 낳고, 분노와 증오가 반복되는 악순환의 어느 지점이었다.

  화장과 겉치장 아래로 가려졌던 이십 대의 맨얼굴은 어색하다. 처음 쌩얼을 드러낼 때처럼 가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두 손으로 가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퀘퀘한 다크서클이 번지기 전에, 피부의 숨통이 막히기 전에 세안이 필요하다. 이십대를 채웠던 가면과 껍데기를 하나씩 거둬내고 뽀독뽀독 때를 지우는 것이다. 모멸의 상처가 더 곪아 문드러지기 전에 우리가 그 맨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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