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무언가 잘못이 없고 온전한 상태를 뜻한다. 예컨대 기계가 정해진 기능을 잘 수행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정상인’은 그런 의미에서 일정한 기준을 통과한, 결격 사유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럼 정상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상, 비정상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데 반해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건 그것이 옳다거나, 진리이기 때문은 아니다. 과거 여성들은 가부장적 가족 질서 아래에서 오랫동안 남성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세적 여성관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기계가 정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정상적’이라고 인식되는 모든 것은 역사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특정한 ‘정상’ 속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한다. 사회 내에서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굳어져버린 생각의 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성이 ‘정상적’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다.
 
  지난 10월 30일 ‘게이, 레즈비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MBC <PD수첩>이 전파를 탔다. 방송 에는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로 살아가는 어려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차별로 고통 받는 성 소수자들의 가혹한 현실은 생존의 문제이다. 하지만 방송 직후 인터넷의 각종 게시판은 <PD수첩>이 동성애를 부추기는 부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난의 글로 가득 찼다. 수년 전부터 <왕의 남자>나 <쌍화점> 등 상업적 영화나 드라마가 동성애를 소재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한 듯하다.
 
  “동성애는 비정상적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은 치료하거나 격리시켜야 할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 소수자들은 일종의 불량품이다. 고쳐야 할 것, 혹은 격리해야 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과연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런 생각이 정당할까? 이는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사고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 자연적인 어떤 것으로 인간을 재단하고 비정상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파시즘적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초역사적인 진리가 아니다. 결국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을 삐딱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치 모든 것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남과 다르다는 걸 두려워하는 심리가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자연스럽게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괴물 취급을 받는다.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은 서로 다른 위치에 처해있지만 공통적으로 그런 정상의 논리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잘못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뿐이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태초에 남성, 여성 그리고 제3의 성인 자웅동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또 당시 인간들은 두 몸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우스가 후에 이들을 반으로 나누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본디 남성 혹은 여성이었던 자들은 자신의 반쪽인 동성과 만나 완전해지고자 하고 자웅동성이었던 자들은 이성을 만나 완전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 속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자기 존재를 완전하게 만들어주고 증명해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정답과 오답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을까. 일부일처제의 낭만적 사랑도 근대 이후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정상적이라는 편견에 갇혀 세상 모든 걸 판단하는 폭력성이 진짜 위험한 괴물은 아닐까.   
정성조 학생

독어독문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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