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속한 건축학부는 설계스튜디오 수업이 많은데, 이 과목은 대개 소수의 인원에 대한  일대일 지도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매주 긴장된 마음으로 자신의 안을 설명하고 교수들은 ‘Critic(비판)’으로 화답하는데, 요즘 필자는 학생들의 장점과  창의적인 생각들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해주는 편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혹시 강의평가를 잘 받거나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젊은 날엔 필자도 혹독한 매질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매섭게 몰아치곤 했다. 하지만 세월을 돌이켜보니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교수에 대한 증오만 키운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실은 학창시절 필자도 그랬다.) 문제는 교수에게 있는 경우도 많은데, 어린 선수에게 우사인 볼트처럼 뛰지 못한다고 닦달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를 고쳐보고자 생각한 것이 칭찬수업이다.
 
  칭찬을 통해 얻는 장점은 여러 가지다. 우선 칭찬은 의사소통의 초석이 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은 사랑에 기초한 행위이다. 그래서 칭찬은 좋은 기운을 전달하는 메신저이며, 메시지 도착 순간 학생들은 닫았던 마음과 귀를 열고 맑은 눈빛으로 대화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이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관계가 전환되는 순간이자 비로소 쓴 소리를 약으로 삼킬 수 있는 순간이다. 칭찬은 학생의 강점을 이끌어낸다. 대다수의 위인들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출중한 하나를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칭찬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약점을 발견케 한다. 한 학생을 칭찬하면 나머지 학생들 역시 질투반 호기심반으로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반대로 비판할 땐 거의 듣지 않는다.) 이 순간 학생들은 자신에게서 부족한 무언가를 다른 친구가 가졌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12명을 칭찬하면 똑똑한 학생은 자신에게 부족한 11가지를 찾아낸다.
 
  하지만 칭찬이 무작정 좋은 것은 물론 아니다. 다양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회는 집단 속에서 하나의 최우수를 선택한다. 이것이 학창시절에는 단순히 A에서 F로 나열되는 차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삶과 죽음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여기에 칭찬의 역설, 교육의 딜레마가 있다. 비판에 귀를 닫고 칭찬에 홀린 나르시스는 결국 물에 빠져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 학생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른바 셀프깨달음의 시도가 필요하다. 안도 타다오의 저서 『연전연패』를 보면 그는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들을 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분석하여 연패의 사슬을 끊어버렸음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한지 깨달았다고 해서 올바른 해법까지 찾을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럴 땐 어떡할까. 여기에 교수의 여러 가지 존재 이유중 하나가 있다. 교수님께서 비판하시기 전에 먼저 질문을 준비하여 선방을 날려보자. 필자는 수업시간 첫머리에 가끔 이렇게 물어본다. “혹시 고민하다가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니?”
 
전영훈 교수
건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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