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가 다한 별은 중력이 작용하는 가운데로 뭉친다. 질량은 공간을 누르고 주변에 있는 것들은 빨려 들어간다. 별은 별빛을 삼키는 블랙홀이 된다.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의 구멍, 블랙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기자는 블랙홀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진 미지의 공포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절대적 어둠을 인간과 관계의 소우주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점과 관계라는 선으로 구성된 작은 우주에는 ‘모멸’이라는 블랙홀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보통의 보도 기사는 팩트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취재 후에 남는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모멸이란 감정을 취재하는 것엔 꽤나 후폭풍이 있었다.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독하게 무지한 문화, 계급의 사생아처럼 상하를 구분하지 않고는 의미를 담을 수 없는 말들. 모멸당한 감정은 치욕스러웠고 모멸 주는 말들은 천박했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듣기만 해도 우울해졌다. 아니 감정이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싶다. 감정의 분쇄였다.

  모멸이라는 블랙홀, 망망대해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떠도는 심정으로 그 칠흑 같은 어둠 앞에서 나는 그래서 무엇이었나. 나는 모멸을 주는 사람인가 받는 사람인가. 취재를 하면서도, 그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기자는 모멸을 우회했다. 모멸과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멸을 주는 나쁜 놈이기도 싫었고 모멸을 받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싫었다. 그저 창밖으로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처럼 기자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순수한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고 위악스런 연기를 했다. 취재라는 행위는 견고하고 영악한 모선(母船)이었다. 모선 안에서 모멸을 바라만 봤다. 취재로써 진실해질 수 있었지만 진실하게 취재하는 것을 비겁하게 피했다.

  교수님의 말로써 논리적 완결을 보강했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을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기자는 모멸에서 떨어져 있었다. 힘들었다. 보도부에서 논란의 대상을 취재한다고 내가 논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을 취재하니 그 모든 것이 기자를 짓누르는 무거운 질량이었다. 거침없이 나에게 집중됐고, 한없이 깊은 우물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번 주의 취재後가 절실했다. 모멸을 다루는 기획, 2주간의 취재를 거치며 쌓여왔던 감정을 소급하는 일, 마음속 처박힌 생각을 술회하는 일, 그것을 통해 기자는 진심으로 내 마음속 깊은 우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팽창하는 블랙홀, 깊게 자리 잡은 우물만이 남아있다. 모멸이라는 감정 앞에서 인정해야만 했던 나의 진짜 모습, 진실하지 못했던 취재 태도에 대한 긴 여운은 진행 중이다. 취재後는 끝났다. 더 커다란 취재전야에 기자는 어떤 모습으로 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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