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인 감정 실태 조사

 

 

  “당신의 세 치 혀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나가 죽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주인공 오대수를 밀실에 15년간 감금시킨다. 가까스로 풀려나 복수심이 들끓는 오대수를 보며 우진은 30년 전의 그날을 다시 곱씹는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날을 기억하면 여전히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쓴 위액이 식도를 타고 역류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이우진이 처절한 복수극을 벌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오대수의 ‘세 치 혀’ 때문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퍼뜨렸던 소문에 우진과 그의 누나인 수아가 창피를 당하게 되고 결국 수아는 자살을 선택했다. 대수에게는 15년간의 감금생활동안 모조리 헤집어보아도 찾을 수 없었던 기억이었지만, 수아에게는 삶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이유가 됐고, 우진에게는 평생을 두고 시달리는 응어리로 가슴에 남았다. 

단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모멸은 그래서 위험하다. 가해자는 ‘대수롭지’ 않았고, 일단 한번 모멸을 느낀 피해자는 좀처럼 건강한 방법으로 이 감정을 표출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다 모멸감은 특히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수치심, 열등감, 자기혐오, 분노, 두려움, 외로움, 슬픔 등이 뒤섞인 채 억눌려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그의 피해의식만을 탓할 순 없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모멸감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정체성을 왔다 갔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대신문 심층기획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중앙인 131명을 대상으로 ‘대학생 감정 실태’에 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 결과 ‘타인의 (무)의식적 행동이나 말에 모욕감, 모멸감 등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에 131명 중 104명, 즉 80%가 있다고 대답했다. 해당 학생들은 주로 외모(42%), 스펙(36%), 경제적 능력(32%) 등에서 모멸을 경험해본 것으로 드러났다. 

 난립하는 디스와 굴욕, 위태로운 대학생 자존감
개인적인 것은 사실 가장 사회적인 것이었다

  단순한 불쾌감이 아닌 모멸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 배경에는 상황적 맥락을 이해해야 했다. ‘모욕 또는 모멸을 느낀 이유’에 대해 묻자 104명 중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상대가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응답했다. 외모, 스펙, 경제적 능력 이외에도 학벌, 전공 등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세워지는 대학사회에서 누구나 상대적 박탈감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나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은근히 깔보거나 무시하는 등 모멸을 주고받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2위로 집계된 30%(31명)의 학생들이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 역시 박탈감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자존감이 하락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당시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이 들었느냐’는 질문에 자신감이 결핍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인다는 응답이 주를 이뤘다. 답변 중에는 ‘내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기분’,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극도의 우울감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등의 의견들이 있었다.

  동시에 응답지에는 숨겨졌던 분노감이 표출되기도 했다. 상대적 비교에서 비롯한 비난, 경멸, 그리고 희롱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으로 이어졌다. ‘상대방은 얼마나 잘났길래 날 무시하나’,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어 더 화가 났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 등의 의견들은 상대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도 함께 쌓여가는 상황에 대한 방증이었다.

자기관리라는 우산을 펼쳐라
‘내가 더 잘해서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앞으로 무시를 못 하게 내가 더 나아져야 겠다.’ 답변 중에는 모멸에 대한 경험을 새로운 자극으로 바꾸려는 노력도 보였다. 상대가 나의 결핍을 무시하거나 지적한다면 상대가 깔보지 못하도록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나름의 극복방법이라면 방법일 수 있다.

  함께 진행된 자기관리에 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총 78%(101명)의 학생들이 현재 외모관리 및 스펙관리 등으로 자신을 가꾸고 있었다. 그 중 ‘언제 가장 자기관리에 대한 자극을 받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60%(62명)의 학생들은 ‘스스로 결핍된 부분을 자각했을 때’라고 대답했고, 이어 28%(29명)의 학생들이 ‘타인에 대해 상대적 열등감이 느껴졌을 때’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결핍들이 스스로 또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그 빈도와 범위가 더 확대된 상황에서 대학생의 자기만족도는 위태로워진 것이다. 

  자기관리를 하지 않으면 모멸의 공격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진다. 존엄보다 굴욕이, 인정보단 ‘디스’가 더 익숙해진 대학사회에서 모멸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모멸의 가해자가 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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