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자기관리인가

제품의 사양을 설명하는 ‘specification'은 이제 사람의 능력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상품의 질을 보증하는 설명서처럼 스펙이 그 어느 세대보다 20대에게 중요해진 이유다. 당장의 취업과 면접에서 나를 돋보이게 할 ‘설명서’를 가꾸고 채우는 활동은 바로 자기관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다홍치마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 하지만 ‘자기관리’라 불리는 것들에 의심이 갈 때가 많은 게 현실이다. 정연희 학생(가명)은 배를 채우는 더부룩함에 불쾌감을 호소했다. 혹시 살이 찌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 올라오는 신물을 누르며 화장실로 곧장 달려간다. 신경성 위염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정연희 학생은 한 학기 동안 무려 10kg의 기복을 보였다. 살이 많이 빠진 그에게 ‘예뻐졌다’며 칭찬 일색을 늘어놓는 주변의 반응 탓에 증상이 더 악화됐다. “저번 학기 초부터 증상이 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예쁘단 얘기를 듣다가 못 들으니까 좀만 살쪄도 못 생겨진 것 같고 몸이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


  ‘비만인 사람들은 다 게으른 게 아니냐.’ 송지인 학생(가명)은 우연히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내려 보다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아직 덜 배운 초등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이겠거니 하며 넘어가고 싶었지만 괜스레 자신을 향하는 하는 말인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가까운 친구들이 하는 말도 아닌데 위축되더라고요. 원망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표출할 수도 없어 더 괴로웠죠.” 그래서 그녀는 방학 때 200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았다.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으며 다이어트에 열을 올렸지만 생각보다 많이 줄지 않는 몸무게는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당시엔 살이 다시 찌면 사람들이 더 빼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서 겁났어요. 사람들이 남의 감정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죠.” 


  힘겨운 퍼스널 트레이닝보다 변화가 빨리 오는 방법이 있다면 그보다 매력적인 유혹이 있을까. 박나혜 학생(가명)은 얼마전 그 유혹에 넘어가기로 했다. 허벅지 두께를 줄여주는 지방분해주사(PPC)를 맞은 것이다. “타고난 체형은 바꾸기 어렵지만 이왕이면 마른 몸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TV며 인터넷에서 즐비한 걸그룹들의 다리를 보며 스스로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얘기하다가도 시선이 자신의 다리에 머물까봐 겁났다. 주사 몇 바늘로 다리가 얇아질 수 있다는 말에 결국 그녀는 병원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주사의 약 기운에 약한 어지럼증과 바늘로 인한 멍 자국이 동반했다. 그래도 그녀는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이제는 더 당당하게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해 나와 싸운다

무시받는 루저가 되기보단 무시하는 위너가 되겠다


  어디서부턴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지만, 자기관리라 불리는 것들에 우리는 다시금 중독되고 만다. 체중감량에 성공한 박성은 학생(가명, 사과대)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면 슬플 것 같다”며 “예전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이었다면 요즘은 사람들의 대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요요가 찾아올까 칼로리 계산이며, 식이요법이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건 비단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멸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이토록 힘들다.

▲ 일상 속 모멸의 파편들
 남보다 못하면 불안하다= 승리감이 주는 쾌감은 알콜의 그것보다 컸다. 조성주 학생(가명, 공대)은 대학 입학 이래로 지속적인 봉사활동, 공모전 등의 활동은 물론 학생대표자의 역할도 맡았다. “2학년 때부터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어요. 보람도 있었지만 일상이 힘들고 가끔은 지치기도 했죠.” 바쁜 하루를 보내며 희열을 느꼈던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바로 승부욕이었다. 이기지 않으면 남는 것은 열패감이다. 모멸은 끈임없이 개인을 분발케 한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니 학원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남들이 노는 시간을 바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이기겠다는 경쟁의식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지, 왜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바빴지만 경쟁에서 진 낙오자가 되는 것보단 그에게 견딜만한 것이었다.  


  최은석씨(가명)는 오늘도 아침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하루를 옥죄는 대외활동은 이번 학기에만 해도 세 개다. “보람 같은 건 못 느껴요. 그냥 시키니까 하는 거고, 시간이 안 맞는데도 억지로 하죠.” 그가 유일한 보람을 느끼는 때는 다른 스펙을 위한 ‘경력 란’을 채울 수 있을 때. 그마저도 ‘넘사벽’의 스펙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면 와장창 깨지기 일쑤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투자한 만큼 결과물이 안 나오면 어쩌나 의구심이 들 때마다 아찔해진다. 남들보다 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루저’가 될 것 같다. 두려움과 급박함에 벌여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또 그렇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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