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재구성  모멸이라는 감정, 알고는 있지만 ‘나는 모멸당한 것 같아’라고 즉각적으로 반응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극히 사적이지만 자존심 때문에 공공연히 표출 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니까요. 하지만 모멸 주는 것을 단순히 누군가를 무시하는 일, 모멸 받는 것을 단지 속 좁게 기분 나빠 하는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만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일러스트 김규리씨

 

 

 

 

 

 

 

 

 

 

내 속이 울부짖고 있다

1주차- 모멸감 품은 대학사회
2주차-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을’이었다
3주차- 모멸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는 방법

일상화된 모멸을 들춰보다

반세기 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유대인 절멸이 한 인간에 의해 논의되던 시절, 절멸의 대상은 풍전등화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격이었고 윤리였다. 아우슈비츠와 크라코프의 독가스는 반세기의 깊은 상처였고 앞으로 다가올 세기의 아물지 않는 피딱지였다. 살상이 만연했고,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몰랐다.

  다행히 사람을 죽이는 독가스는 인류의 처절한 반성에 당분간은 누수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일상은 지독한 독가스로 가득하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누군가에 의해 무시당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 관계의 기저에 푹 깔려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존엄은 언제든지 깔아뭉개지고, 자존감은 닳아 없어진다. 반성 없는 역사는 또다시 되풀이된다. 인지하지 못한 모멸은 어떠한 결과를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

  외모를 평가합니다=“살쪘다”, “살 좀 빼라”라는 말이 안부 인사처럼 쓰이는 요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모멸의 가장 일상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여대에 재학 중인 이수진(가명) 학생은 자신이 무언가 먹고 있는 모습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볼 때마다 “저 언니 또 먹어”라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허벅지가 두꺼우니 다이어트 좀 하라는 말이 어김없이 뒤따른다. 한 번도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녀는 친구들의 반복된 말들로 인해 자신감을 잃게 됐다.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어느 순간 내가 뚱뚱하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이어트 하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평가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죠” 이수진 학생은 급기야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약속 자체를 하지 않게 됐다. 

  때로는 직접적인 무시보다 은연중에 표출되는 무시가 더 견디기 힘들다. 대학에서의 모멸은 정소미 학생(가명)이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함께했다. 뒤풀이 자리의 선배들이 같이 술 마시던 예쁘고 잘 노는 애들 몇 명을 데려간 것이다. 몇몇 선배들에 의해서 ‘잘나가는 사람’을 우대하는 문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기준에 부합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문득 박탈감이 느껴졌다. 내내 ‘나는 예쁘지도 않고 잘 놀지도 못하는구나’라는 자책만이 그의 마음속 심연에서 울부짖었다. 부당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괜한 자격지심이 온몸을 소용돌이처럼 휘감아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낼 수가 없었다.

  학교를 비교합니다=외모를 평가한다면 학교는 비교한다. 비교는 우위를 낳는다. 누구와도 비교 가능한 ‘학교’는 대학사회에 가득한 모멸의 우물이다. “동생은 어느 학교 들어갔어?”라는 친구의 말에 여느 때처럼 “○○대학교 다녀”라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남효주 학생(신문방송학부 3)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답변에 돌아온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어떡해.” 동생이 지방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떡할’ 일은 아니었다. 의도가 어떻든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지방대에 다니는 동생이 문제가 된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에게서 문제를 찾는 경우도 있다. 안성캠에 입학한 서은아 학생(가명·사과대)은 “지방 국립대를 갔으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을 텐데 왜 분교로 입학해서 이런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중앙인 커뮤니티에서조차 안성캠퍼스는 ‘구조조정의 대상’, 심한 경우 ‘안성충’이라는 말로 불리는 현실에서 그녀가 떳떳하게 설 자리는 없다. 중앙대 다닌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안성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찜찜해지는 그녀, 학벌의 모멸은 개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의식하지 못하기에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일상의 대화, 의미 없는 농담들에도 모멸이 숨 쉰다

  모멸은 비교우위가 가능한 모든 대상에 작용한다. 대학 간판, 캠퍼스 위치 이어 학과에서도 모멸은 발생한다. 박성은 학생(가명·사과대)은 동아리에서 “너 졸업해서 뭐 하려고 그 학과 갔어”라는 말을 들었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학문에 대한 평가와 비하도 스스럼없어진 것이다. 상경계 학생이 많은 동아리에서 “경영경제 복전 안 하면 백수 되겠네”라는 말이 관용어구처럼 반복된다. 누구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그였지만, 작아지는 자신감에 시작조차 힘들어질 것 같았다. 마치 ‘유리 천장’이 생긴 것 같았다.

  정체성을 부정합니다=원구처럼 매끄러운 사람은 세상에 없다. 어떤 사람이든 모난 부분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모난 것도 각자의 정체성이다. 인문대에 재학 중인 김형식 학생(가명)은 아픈 다리 때문에 군대에 가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처럼 걷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군 면제 판정은 군 생활보다 더 가혹한 모멸의 시작이었다. “나 같아도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다리 한번 병신 만들어 봐도 되겠다.” 군 면제판정을 받기 전까지 아픈 다리는 그의 약점이었지만 이제 그 다리는 잘못된 다리였다. 이것은 정체성의 부정과도 맥을 같이했다. “아픈 다리는 원래 저의 정체성이고 저의 모습인데 마치 저의 다리를 특권을 가능케 한 잘못된 다리라고 비하할 때 마다 저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어요.” 모멸에 관한 모든 문제는 악의적 의도는 없었다는 것, 그래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던진 말에는 언제든지 모멸의 씨앗이 자리 잡을 수 있다. 

  믿음과 신념의 문제도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으로 치부되곤 한다. 소위 ‘개독교’라는 말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개인의 신념까지 당연하게 욕할 수 있다. 김규훈 학생(아주대 컴퓨터공학과)은 자신이 믿는 종교로 인해 모멸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군에 입대해서도 군종병으로 활동하며 종교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군종병 파견을 허락받는 자리에서 치욕적인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소대 간부에게 허락받으려고 갔더니 예수님 욕하면 허락해주겠다고 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믿어온 저의 믿음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멸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종교는 여타 시시콜콜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육두문자를 붙여가며 해당 종교의 신을 욕하는 일도 빈번했다. 남들에게는 우스갯소리였기 때문에 심각하게 반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허 웃어넘기면서도 마음속에 모멸의 감정은 하나둘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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