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부 잘하는 친구를 시샘해왔고 여전히 그러하고 있다. 수능을 준비하는 친구뿐만이 아니라 대학에서도, 더 나아가 사회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을 시샘하고 질투한다. 분명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공부를 하고 열심히 연구하는데 왜 저 친구는 나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이 질문은 꽤나 쉬운 정답을 해답으로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이미 여러분의 대학과 학점은 정해져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이라는 그룹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대학에 와서도 성적 장학금은 매번 받는 친구들만 받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 글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다.
그동안 지겹게도 들었던 저 사실은 심지어 취업 전선에서도,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 - 인생 설계와 자아 정체성, 적성 탐구, 전공에 대한 고민을 포함한 소위 자기 계발 - 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이 어떠한 교육 방식을 거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시샘의 객체로서 수많은 경험을 해왔을 것이다. ‘산 경험이야 말로 가장 좋은 선생이다’라는 격언처럼 그들은 그들의 삶을 2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단순히 고등학교 3학년, 매 학기의 학점, 그리고 1년의 취업 준비를 위한 벼락치기는 통할 리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안다. 하지만 모른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잘난 체 하네’로 대변되는 인정하지 않는 자세로 여전히 우리 자신을 급히 변호하고 있을 뿐이다.
시샘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 차이에 대한 피로를 단기적으로 만회하려는 시도 - 에 대한 대안으로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의 키워드를 제안한다. 그는 ‘사색’과 ‘분노’를 내어놓는다. 사색은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능동적으로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분노는 현재 일을 중단하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여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 사색과 분노를 통해 개인의 소진을 막을 수 있지만 이를 선택한 사람은 지금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고 만다. 방학의 학교를 보아라. 우리는 쉬지 않는다. 전부 스펙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시대가 되었다. 단편적인 예시지만 이런 임시방편으로는 절대적 총량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 또 다른 의문,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쌓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만회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시작을 인정과 행동이라 정의하고 싶다.
우리가 시간과 경험이 부족한 상태라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자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절반이라는 격언처럼 준비단계는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인정만 하는 자세는 일차원적인 발전밖에, 절반의 성공이라는 아쉬움이 따른다. 벼락치기와 같은 임시방편과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사색과 분노 - 인정에서 그친다면 변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사실은 늦지 않았다’는 헛소리가 먹히지 않는 이 절대적 시간과 경험은 우리의 부족함을 만회하기 위한 절대적 시간과 경험을 위한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시 쌓아 올라갈 발판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맞이한 절대적 시간과 경험이 부족한 비참한 현실이다.
건축학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