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뚜껑 없는 박물관

  1920년대에만 해도 최신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 이 두 가옥은 인왕산 언덕에 지어져 3.1운동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딜쿠샤는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가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에 살던 홍난파 선생도 젊은 시절 기자로 활동하며 딜쿠샤를 드나들었을 것이다.
 
외국인들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근대가옥

딜쿠샤도 홍난파 가옥처럼 깨끗하게 보존되고 싶다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일대에는 일제강점기부터의 역사를 간직해 온 빨간 벽돌집들이 있다. 홍파동과 행촌동에 각각 위치한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의 주택양식과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켜켜이 쌓인 벽돌에는 세월이 주는 아우라가 짙게 배어 있었다.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는 조선에 들어와 살았던 외국인들의 손으로 지어졌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따라 적색 벽돌로 마감된 외형은 이 일대의 낙후된 배경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걸어서 3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가옥은 한양 도성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발견할 수 있다. 인왕산 언덕배기에 지어져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울을 내려다 본 두 빨간 벽돌집. 여태껏 역대 주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 두 가옥은 엇갈린 운명에 처해있다.
 
동요의 성전으로 남은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은 과거 한양 도성길이 있던 자리에 있다. 지도상으로는 동네 전체를 성곽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도시화가 진행된 지금은 그 자취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행히도 홍난파 가옥 근처에는 종로구의 복원사업으로 성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도성길을 따라 월암근린공원을 산책하다보면 공원 끝에 있는 빨간 벽돌의 홍난파 가옥을 만날 수 있다.
 
▲ 홍난파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다.

 

  홍난파 가옥은 1930년 독일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풍의 근대가옥이다. 당시엔 홍파동 일대가 독일인 집성촌을 이루었고 독일 영사관도 들어서 있었다. 전망이 좋은 높은 터에 자리 잡아 당시에도 집값이 비쌌다고 한다.
 
  현재 홍난파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보존·관리 하고 있다. 종로구는 이전 집주인으로부터 주택을 매입하여 깨끗하게 리모델링했고 홍난파 선생의 자취와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홍난파 선생의 가옥에 들어서면 우렁찬 가곡이 울려 퍼진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방 한 켠에 놓여있고 벽면엔 홍난파 선생에 대한 전시물이 걸려있다. 방문한 관람객들을 반기는 것은 홍난파 선생의 후손들이다. 관람객들은 그들로부터 직접 홍난파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일주일을 돌아가며 관람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 “홍난파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지휘할 때 입었던 연미복을 입혀 화장해달라고 하셨을 만큼 음악을 사랑하셨어요.” 홍난파 선생의 손녀 홍선표씨의 말이다. 
 
  홍선표씨는 책 앞쪽에 적힌 글귀가 참 감동적이라며 홍난파 선생의 유품 중 하나인 동요집을 소개했다. ‘첫 솜씨로 만든 이 적은 노래책을 조선의 어린이들께 드리나이다.’ 이 동요집은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노래들을 묶어 낸 것이다. 홍난파 선생은 어린이들을 사랑했고 이들을 위해 <봉선화>, <고향의 봄>을 비롯해 많은 동요와 가곡을 남겼다. 
 
  홍난파 선생은 생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활동했다. 동시에 그는 일제강점기에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가 없었던 것을 마음 아파하며 어린이들이 덕성과 심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동요를 짓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봉선화>가 <애수>라는 곡명으로 발표됐다. 그는 늑막염으로 1941년 작고하기 전 마지막 6년을 빨간 벽돌집에서 보냈다.
 
보존의 손길을 기다리는 딜쿠샤
▲ 딜쿠샤로 가는 골목에 은행나무가 보인다.
  홍난파 가옥에서 나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멀리서 보아도 몇 아름은 될 만큼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이 나무는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수령은 42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는 또 다른 빨간 벽돌집이 있었다.
 
  이 빨간 벽돌집의 이름은 ‘딜쿠샤’,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 1923년 이 집을 지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와 메리 린리 테일러 부부가 붙인 이름이다.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는 UPI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으로 활약하며 3.1운동 소식을 세계 각지에 알린 사람이다. 테일러 부부는 이곳에서 1942년까지 살았다.
 
  하지만 딜쿠샤는 홍난파 가옥과는 다르게 허름한 외관을 갖고 있다. 저택이 지어질 때만해도 한국에서 제일 큰 개인 벽돌 저택으로 이름이 났지만 지금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딜쿠샤는 오랫동안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어 왔고 1995년엔 서울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및 언론박물관으로의 조성이 시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딜쿠샤의 소유권이 언제, 어떻게 이전되었는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경성에서 출생한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 서울을 방문하여 이 집에 대한 비밀을 풀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현재 딜쿠샤 안에 쪽방들을 10여개의 저소득층 가구가 나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은 깨져 있고 낡은 나무 바닥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소리를 냈다.
 
▲ 딜쿠샤는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아 낙후됐다.
  딜쿠샤의 건물주는 한국자산관리공사지만 언제부터인가 들어와 살던 이들을 거리로 내 몰수는 없었다. 종로구도 딜쿠샤를 문화재로 등록하자는 사회적 여론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뾰족한 방도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상향과 희망의 궁전, 행복한 마음을 뜻하던 딜쿠샤는 보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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