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 기자는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 인터뷰를 잠시 내려놓았다. 시험을 치르느라 바쁜 후배 기자를 대신하여 ‘그가 사는 이야기’ 인터뷰에 뛰어든 것이다. 이번학기 새롭게 편성된 그가 사는 이야기는 20대 청춘의 고민을 싣는 인터뷰다. 사람에 관심이 많은 기자가 지난방학 동안 야심차게 준비한 코너지만 직접 취재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함 반 설렘 반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고민이 있는 청춘을 물색하기 위해 야심한 밤 캠퍼스를 배회하던 기자는 해방광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선후배 사이인 여학생들이었다. 고민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선배 학생이 입을 열었다.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어요. 후배가 남자친구가 생긴 뒤 제게 많이 소홀해요. 예전에는 저와 매일 붙어 다녔는데 말이죠. 혼자 남겨진 기분이에요.” 남자친구와의 문자에 몰두하고 있는 후배를 보며 그녀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얘는 지금 영혼 없이 제 옆에 앉아 있는 거예요.” 대화에 건성으로 참여하는 후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씁쓸했다.
 
  ‘영혼 없다’는 표현이 기자의 뇌리에 맴돌았다. 요즘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며 다른 이를 지적하기도 하고 반대로 남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영혼이 없다는 말을 나름대로 정의해본 결과 진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로 곧장 치환되는 듯하다. 그 뜻을 새겨보니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행동과 말을 던졌던 기억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돌이켜보면 진심이 묻어나지 않는 말과 행동에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지난학기 심한 독감에 걸린 적이 있었다. 독감은 기자의 몸을 한번에 정복하지 않고 조금씩 세력을 넓혀나갔다. 가벼운 감기이겠거니 짚어 넘겼던 기자는 마감 당일 병마를 얕보았던 대가를 치렀다. 끓어오르는 열과 두통을 견디지 못해 선배에게 말을 건넸다. “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선배는 어서 병원에 다녀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아무리 아파도 주사 맞고 와서 기사 써야 하는 거 알지?”
 
  섭섭했다. 선배는 그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기자 또한 할당된 기사는 반드시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인만큼 그 정도 책임감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터였다. 그러나 원인 모를 불편함이 기자의 마음을 옭아맸다. 병원에 서둘러 다녀오라는 선배의 말에 후배에 대한 걱정보다 마감에 대한 걱정이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자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다.
 
  신문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새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5번의 조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영혼이 담기지 않은 말을 수없이 반복해왔지만 이제는 영혼 없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으려고 한다. 진심이 결여된 칭찬과 행동이 기자에게 당장 득(得)이 될지라도 말이다. 마음에 없는 말로 상대를 속이고 싶지 않다. 기자가 건넨 호의에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상대가 실망할 것이란 사실을 안다. 5주라는 시간을 남겨둔 채 아직 늦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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