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한다. 삶에 지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노래로써 희망을 주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 공연에 갔었어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도 아이들이 먹어본 적이 없으니 손을 대지 못하더라고요. 참 씁쓸했어요.” 인터뷰 중간중간 기자에게 고운 노래를 들려주던 소프라노, 채미영 동문(성악과 87학번)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박가현 기자
새로운 무대를 시도한다는 것은  즐겁고 설레는 일
소리의 힘으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 채미영 동문은 유아시절부터 남다르게 큰 목청으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37년의 노래 인생을 방증하듯 그녀는 어떤 무대에 서더라도 두려운 법이 없다. 이제는 클래식을 뛰어넘어 팝, 오페라, 뮤지컬, 국악 등 다양한 장르까지 섭렵했다. 압구정에 위치한 음악원에서 제자 지도에 힘쓰고 있던 채미영 동문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소프라노인데 어렸을 때부터 노래 실력이 출중했나.
“6살 무렵이었나요. 왜 유치원에서 생일 축하 파티나 송사 행사를 하잖아요. 노래를 잘 부르는 저를 유치원 선생님께서 발견하고 인정해주셨어요. 또래보다는 제가 노래 실력이 좋았던 것 같아요.”
-노래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건가.
“공부는 잘하지 못했는데 노래에 대한 이해력 하나는 기똥찼나 봐요. 주위에서 자꾸 노래를 잘 한다고 칭찬해줬거든요. 절로 자신감이 붙었죠. 자연스럽게 제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성악가라는 한 길만 바라보게 되었어요.”
-유치원 선생님이 참 고마운 분이겠다.
“아직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처음으로 저를 알아봐 주신 분이잖아요.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을 다시 뵌 적이 있어요. 시간이 흘러 80세 가까이 되셨지만 작은 키에 파마머리, 안경을 쓴 모습까지 제가 6살 때 느꼈던 선생님이 그대로 계셨어요. 언니와 저를 사랑으로 대해주셨던 분을 만나니 가슴이 뭉클했어요.”
-언니와 각별한 사이였는지.
“서로에게 많이 의존하는 자매였죠. 언니와 항상 붙어 다녔어요.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언니를 제가 많이 도와주어야 했거든요. 제 가방은 어깨에 메고 언니의 가방은 작은 수레로 끌며, 언니의 손을 잡은 채 험난한 등굣길에 올랐던 것이 생각나네요. 언니가 넘어지면 저도 자동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죠. 하도 많이 넘어지니까 더 이상 상처가 낫지 않더군요. 이제는 다리에 판박이처럼 박혀버렸어요.(웃음)”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된 배경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레슨이란 것을 처음 받아봤어요. 지인의 소개로 제 고향인 광주에 공연을 오셨던 테너 엄정행 선생님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던 덕분이었죠. 선생님이 노래하셨던 자리에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성악가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어요. 특히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언니에게 힘이 되고 싶었나봐요. 소프라노가 된 지금은 장애인 올림픽이나 체육대회가 열리면 자주 공연을 가고 있어요.”
-처음부터 소프라노가 되고 싶었던 건가.
“어린 아이가 소프라노가 뭔지 알았겠어요. 단순히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음악에 대한 책도 찾아보고 성악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소프라노를 알게 됐고요. 그래봤자 여자가 노래하는 파트가 소프라노구나 하는 정도였지만요.”
-결국 소프라노의 길을 걷게 됐는데.
“성악을 배우는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음역대, 성량, 음색이 점점 변화해요. 때문에 대부분 성인이 돼서야 세부 장르를 결정하죠. 유학을 가서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고요. 저는 높은 소리와 풍부한 성량이 특징이라서 소프라노가 맞겠다 싶었어요. 성격이 화통하신 아버지의 풍부한 성량과 천상 여자이신 어머니의 고운 음색을 제가 똑 닮았거든요. 전라도 사투리에 평상시 목소리가 걸걸하니까 가끔 국악을 하느냐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노래할 때는 두성과 호흡의 힘으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고운 노래가 나오죠.”
-부모님은 음대 진학에 긍정적이셨나.
“제가 음악만 생각했던 것처럼 부모님도 딸이 음악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셨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노래를 쉰 적이 한번도 없어요. 엄정행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도 혼자서 연습을 했고요. 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흘러나오는 가곡을 따라 불렀어요.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 전국음악협회, 호남예술제, 대학교에서 주최한 콩쿠르의 상을 휩쓸기도 했어요.”
 
 
▲1990년 서울 KBS 신인 음악 콩쿠르 무대에 올라 열창하고 있는 채미영 동문.
  대회에 나갔다 하면 1등상을 받아버렸던 채미영 동문은 사람을 위하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다. 중앙대 성악과에 진학하면서 그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남다른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신입생 음악회를 통해 자신의 마음가짐을 보여줬다는 그녀의 학부시절이 궁금했다.
-중앙대를 택한 이유가 있나.
“중앙대에 계시는 채리숙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제 실기를 담당해주신 교수님으로서 어머니처럼 푸근한 분이셨죠. 학교를 다니는 내내 저를 담당하며 지도해주셨어요. 매학기 희망하는 담당교수를 적어낼 때면 1지망에 채리숙 교수님을 썼어요.”
-대학 합격 통지를 받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오죽했으면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서 제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니까요.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정말 날갯짓을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작 입학해보니 제게 쏟아지는 시선은 싸늘함뿐이더군요.”
-학교 적응이 힘들었던 건지.
“음대라는 특성상 예고 출신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처럼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제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기들이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된 건데 참 힘들었어요. 차 트렁크에 짐을 실어서 안성 기숙사까지 내려주고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며 많이 울었죠.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과 외로움을 함께 달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어요.”
-울적할 때마다 찾았던 곳이 있다면.
“학교 음악실에 가곤 했어요. 다른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 저는 음악실에 가 노래를 연습했죠. 대학에 합격하면 왜 신입생 환영회가 있잖아요. 신입생 음악회에서 꼭 1등을 하고 싶었어요. 다들 입학했을 때 서로의 실력을 모르고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제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은 거예요. 성악과에서는 신입생 음악회에 설 인원을 3명 뽑았는데 결국 제가 세 손가락 안에 들었죠.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니 저를 보는 동기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어요. 어떤 동기는 제게 편지까지 쓰며 친해지고 싶다고 했어요.”
-동기들의 반응이 당황스럽진 않았나.
“많이 의아했죠. 얘네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서울 친구들은 말을 건네는 모양이 참 예쁘더라고요. 금세 동기들과 친해졌어요. 한번 어울리고 나서는 신이 나서 친구들을 따라다녔죠.”
-열심히 연습한 덕을 본 건가.
“착실함 하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생각해요. 수업 출석은 물론이고 실기 과목에서는 A+를 놓친 적이 없어요. 졸업할 때 음악대학을 통틀어 한 명의 학생에게 주는 실기 장학금도 받았어요. 전 학년 성적을 합산해 수석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게 굉장히 의미가 깊은 장학금이에요. 학교 공부 외적으로도 음악회를 다니며 견문을 넓히곤 했죠.”
-기숙사 생활을 하며 서울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다니기 어려웠을 텐데.
“그래서 2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더라도 음악회를 통해 예술적인 감성을 기르고 싶었어요. 기숙사에 살 때는 음악회에 가기 정말 어려웠거든요. 음악회에 갔다가 안성에 오려면 중도에 차가 끊기기 일쑤였어요. 또 기숙사 통금은 오후 10시라 점호를 지키지 않은 꼴이 되어 버리고요. 어머니에게 열심히 생활하겠으니 믿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자취를 시작했어요. 가고 싶었던 음악회를 보러 다니니까 가슴에서 음악적인 그림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더라고요.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제가 그 공연의 주인공이 된 듯 싶었어요.”
-학부시절 무대에 서 본 경험은 있었나.
“누가 대학교 2학년을 공연의 주인공으로 세워주겠어요.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채리숙 교수님의 추천으로 동아콩쿠르에 나갈 수 있었어요. 이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구름 위에 올라와 있는 기분이었어요.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이름 있는 대회였기에 교수님들이 인정하는 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었거든요. 동아콩쿠르에서 입상하고 이듬해 참가한 서울 KBS 신인 음악회에서 최고 대상을 받았죠. 무대에 서면서 제 실력에 대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국제 무대에도 올랐다고.
“노래 실력을 내로라하는 친구들과 2달간 해외에 나간 적이 있어요. 각국의 저명한 선생님들에게 레슨을 받는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상 여행을 하러 간 거였죠. 우리에게 레슨은 부수적인 일정이었어요. 그런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계셨던 선생님의 눈에 제가 띈 거예요. 선생님께서 한국에 이렇게 좋은 소리를 가진 친구가 있냐며 저를 국제콩쿠르에 내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 속절없었죠. 다른 친구들이 신나게 여행을 다닐 동안 꼼짝 없이 선생님 집에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노래들을 마스터해야 했어요.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행은 물거품이 됐겠다.
“여행은 고사하고 하루 종일 풀레슨을 받았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칠 때가 많았죠. 무엇보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부분을 제가 소화해내지 못할 때가 괴로웠어요.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콩쿠르에서 입어야 했던 복장도 제가 소화하기는 무리였어요. 국제 콩쿠르에 나갈 줄 모르고 한국에서 평상복만 챙겨왔기 때문에 선생님이 매번 드레스를 골라서 무대에 올려주셨지요. 감사했지만 저랑 취향이 너무 달랐어요.(웃음)”
 
▲ 대학교 3학년 시절 채미영 동문이 피아니스트 서혜경씨와 동아콩쿠르 시상식에서 함박 웃음을 짓고 있다.
  자신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게 나름의 고역이었다고 고백한 채미영 동문.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그녀는 대중 가수 못지않게 가지각색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의 노래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해 12월 tvN 예능프로그램 <퍼펙트 싱어 VS>에도 출연했는데.
“무대에서 대중들과 호흡하는 걸 좋아해서 무대를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나미의 ‘슬픈 인연’으로 가수 이정과 대결을 벌였죠. 소프라노지만 최대한 가요에 맞춰 무대를 살리고 싶었어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부르려고 고민을 많이 해요. 대중들은 가수가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지 못하고 노래를 하는 그 순간만 기억해요.”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비법이 있는지.
“아무래도 편곡에 신경을 쓰게 되죠. 기왕이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편안한 무대에 서는 게 좋잖아요. 무대마다 어울리는 곡도 다 다르죠. 적절한 편곡은 공연에서 좋은 분위기를 유도하는 요소가 될 수 있어요. 특정 장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한층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제 모습을 바꿔서 공연에 가는 거예요. 제가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 입었다고 생각해도 대중들이 봤을 때는 제 스타일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잖아요.”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오히려 안 해본 것을 제가 만들어간다는 즐거움이 있어요.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분야의 음악가들을 만나다 보면 어깨 너머로나마 그 장르의 느낌을 익힐 수 있거든요. 당시의 인상을 기억해놓았다가 제가 무대에 설 때 어울리는 분위기를 끄집어내는 거죠. 이 가사에는 어떤 선율과 악기가 어울리는지 말이에요.”
-뮤지컬에도 도전했더라.
“2011년에 MBC 창사50주년을 맞아 뮤지컬 <원효>가 기획됐어요. <원효>의 진덕여왕 역에 캐스팅됐죠. 처음으로 연기를 해봤는데 오페라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노래로서 모든 이음새를 이어나가는 오페라와 달리 뮤지컬은 노래, 춤, 대사로 극이 전개됐어요. 지휘에 따라 공연 시간이 다소 유동적인 오페라에 비해 정해진 시간 안에 꼭 끝을 내야 했고요. 동선이 굉장히 빠르고 정확해야 했고 대사에도 악센트가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어요. 그래서 선배 연기자들에게 액센트를 일일이 집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지만 질문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어요. 저는 연기가 처음이었고 어찌됐던 최선을 다해 뮤지컬을 끝내야 했으니까요.”
-만족스러운 뮤지컬이었는가.
“3개월 동안 정말 재미나게 뮤지컬에 임했어요. 아침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저희 팀이 맹연습에 돌입하는 시간이었죠. 나이가 드니 장시간 연습이 힘들긴 했지만요.(웃음)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진덕여왕보다는 주인공인 요석공주 역을 맡고 싶었어요. 누구든지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요석공주는 아가씨인데 40대인 제가 아무리 꾸민다 한들 그 느낌이 살겠어요? 진덕여왕 역에 순응하고 관객들이 여왕의 포스를 느낄 수 있게 열심히 연습할 뿐이었어요.”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앨범 제작을 생각하고 있어요. ‘사라수’라는 노래를 꼭 앨범에 싣고 싶어서요. 세월호 캠페인 송으로 SBS에서 나간 적이 있는 곡이에요. 작곡가 주영훈씨가 제가 부르면 좋겠다고 해서 영화 OST용으로 만들어뒀던 곡인데 세월호 사건을 애도하는 의미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제 노래를 많은 분들이 들어주셔서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 채미영 동문이 신사동에 위치한 한 음악원에서 제자 수호군(19)의 발성을 지도하고 있다.
  사라수 노랫말
“잊으셨나요. 버리셨나요. 세월 뒤편에 숨으셨나요. 하루를 살아도 천년의 설움 얼마나 더 아파야 내 마음 들을까요. 기다림은 눈물로 추억은 한숨으로 젖은 꽃처럼 저물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또 다시 가고 싶은 곳이에요. 학교를 생각하면 그저 좋아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말이에요. 5년 동안 학교에 출강을 나갔었기 때문에 느낌이 더 남다른 것 같아요.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 딸을 가르친다고 생각했거든요. 후배들과 최신 유행하는 화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제가 직접 화장을 해주기도 했지요.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고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는 터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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