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하, 대한민국 청춘의 삶은 피곤해 보인다. 이번학기 오전 9시에 시작하는 강의를 하나 맡고 있다. 상쾌한 아침의 기운을 받아 초롱초롱 빛나는 학생들의 총기 어린 눈을 보면서 한껏 신바람을 타던 내 강의의 리듬은, 강의실 한편에서 머리를 파묻고 엎드려 자는 학생들의 등판이란 암초와 정면충돌하게 되면 돌연 풀이 죽고 만다.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에 화가 나다가도 과중한 과제, 팀플 준비, 아르바이트, 스펙 쌓기, 시험 및 취업 준비 등으로 팔모로 분주한 고달픈 젊음이 안쓰러워 보여 선뜻 깨우기가 망설여진다. 왜 우리 학생들은 지쳐있는가?

  청춘이 앓고 있는 만성피로는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진단처럼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과거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는 ‘∼해서는 안된다’였다. 19∼20세기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더 많이 규정해 놓은 ‘부정성의 과잉’시대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과사회의 모토는 ‘예스 위 캔’, 말하자면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다. 물론 이 긍정성의 철학은 생의 에너지이자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란 측면에서 타당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긍정성이 지나치게 강요되는 사회는 병들기 쉽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저항적 범죄자를 낳았다면 성과사회의 긍정성은 우울한 낙오자를 낳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부족한 잠이 초래한 육체적 고단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성과를 향한 모종의 압박이 피로의 정신적, 심리적 요인일 터이다.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훈육하는 자본주의 무한 경쟁사회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포섭된 청춘의 몸은 느른하고 마음은 간난하다. 긍정성의 과잉 신화는 생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몰아간다. 긍정성의 맹신은 반성적 자기 성찰을 불허한다. 요컨대 피로란 성과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하는 자유(경쟁논리)가 분만한 자기 착취의 사회 질환이다. 과잉노동으로 인해 탈진한 주체가 독대하게 되는 것은 공허한 자아일 뿐이다.

  물론 나는 자신이 꿈꾸는 일에 몰두하며 밤을 하얗게 새운 젊은이들의 충혈된 토끼 눈을 좋아한다. 최선의 노력 끝에 찾아오는 성취감의 동반자인 ‘행복한’ 피로를 응원한다.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 임신한 ‘건강한’ 과로를 존중한다. 이런 피로야말로 청춘의 특권이다. 헤르만 헤세는 <젊음의 초상들에게>에서 자신이 통과한 청춘의 길을 이렇게 되짚는다. “많이 잘못됐고, 많이 뒤집혔지만 / 그래도 그 길을 내가 뉘우칠 수는 없다.” 그렇다. 방랑하는 청춘의 노정은 시행착오의 피곤을 무릅쓴다. 동시에 나는 과열된 경쟁사회에서 해방되어 깊은 심심함을 향유하는 낭만적 청춘의 일탈을 긍정한다. 피로사회로의 예속을 거부하며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모색하는 대안적 청춘의 백일몽을 사랑한다. 내 수업 시간에서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의 피로가 ‘행복하고 건강한’ 과로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류신 교수
독일어문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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