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크리켓 대표팀 탄생
  설움을 이겨내고 사상 첫 승
 
  태극기를 휘날리며 경기장을 꽉 채운 관중들의 환호를 마주한다. 크리켓 대표팀의 박태관 선수(스포츠과학부 2)는 뿌듯한 마음으로 태극마크가 새겨진 단복을 입고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열에 맞춰 걸어갔다. 박태관 선수는 “개회식 전에는 국가대표라는 말뿐이지 와닿지 않았다”며 “태극 마크를 단 단복을 입고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니 그때서야 정말 국가대표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박태관 선수가 처음부터 크리켓이라는 생소한 스포츠를 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해 대학교 1학년까지 야구선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상과 프로야구 세계의 높은 벽 앞에 그는 야구를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야구를 그만둔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박태관 선수는 “야구를 그만두고 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며 “심리 쪽을 좋아해서 스포츠 심리를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재활훈련을 마치고 초등학교 리틀야구단 코치 생활을 하던 그에게 다시 운동선수가 될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12년에 크리켓이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 대한크리켓협회에서 일하던 친구의 형이 크리켓 대표팀에 참가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박태관 선수는 그 기회를 잡기로 했다. 그는 “비록 야구선수로서는 실패했지만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며 “야구와 비슷한 크리켓선수로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당시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갑자기 소집된 당시 크리켓 대표팀은 여러모로 열악한 상태였다. 전직 야구선수 6명과 체육교사 출신, 외국에서 어렸을 적에 크리켓을 접했던 선수 등 각양각색의 구성원이 모였다. 운동 환경도 좋지 못했다. 처음 5개월 정도는 실내 야구연습장에서 훈련했다. 이후에는 전지훈련을 갈 때 빼곤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훈련했다. 몇몇 장비는 대학 동아리 장비를 빌려 쓰다가 나중에 사비로 개인 장비를 샀다. 박태관 선수는 “2014년 8월에야 크리켓 전용구장이 완공됐다”며 “인천 전용구장에서는 한 달 정도밖에 훈련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외지에서 훈련하며 지내온 크리켓 대표팀이지만 비인기 종목에 대한 주위 시선 또한 달갑지만은 않았다. 한번은 단합을 위해 선수단이 등산했을 때였다. 응원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홍보할 겸 SNS에 이를 올렸다. 하지만 차가운 댓글들이 선수들을 괴롭혔다. 박태관 선수는 “몇몇 사람들이 ‘대회가 얼마나 남았다고 등산을 하냐, 운동은 잘하고 있냐’고 비아냥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켓 대표팀은 아시안게임을 위해 다른 일을 미뤄놓고 훈련에 전념했다. 그리고 2년 동안 훈련한 결과를 보여줄 기회가 왔다. 중국전에서 사상 첫 승을 거두며 조 2위로 8강에 진출한 것이다. 이날의 승리에 대해 박태관 선수는 “공격으로 먼저 시작했는데 점수를 많이 냈다”며 “거기다 비가 오면서 경기 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운까지 따랐다”고 전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값진 성과를 거둔 크리켓 대표팀이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대표팀 구성원들 상당수가 크리켓이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박태관 선수는 크리켓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향후 계획에 대해 그는 “일단 군대를 갔다 와야 하고 학교도 더 다녀야 하지만 외국에서 크리켓을 좀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아시안게임 크리켓 대표팀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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