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지위여하를 막론
이곳에서는 모두가 ‘인문시민’

삶이 무기력한 노숙인들도 
인문학을 통해 활기 찾는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부모와 자식들은 TV를 켜는 대신 외투를 걸친다. 바로 강의가 열리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이 요상한 일은 독일의 시민학교 ‘폭스호크슐레’에서 일어나고 있다. 독일에서는 대학이 아닌 동사무소나 시민단체에서 대중들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본인의 취향에 따라 악기, 미술을 배우거나 문학, 철학 등의 모임을 찾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독일 시민의 여가활동이다. 이른바 ‘시민 인문학’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있는 현장의 모습이다.
 
▲ 연희동 수유너머에서 회원들은 인문학 세미나를 연다. 사진 안지연 기자
 
  인문학을 매개로 맺어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시민 인문학을 이끄는 공동체들이 있다. 무릇 지식이란 게 강단 안에서만 머물고 실제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철학의 기본 전제다. 인문학 위기론과 함께 대학의 인문학이 침체되면서 대학 외부에서는 대중과 직접 만난 인문학 공동체들이 생겨나게 됐다.
 
  2000년 초반,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를 시작으로 ‘철학아카데미’도 문을 열었다. 철학아카데미 최현혜 사무국장은 “철학과 대학원을 마치신 선생님들이 학교 밖의 연구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철학아카데미를 세웠다”고 말했다. 이 단체들 모두 대학의 인문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창립한 것으로 이제는 15년의 역사가 깃든 인문학 연구 공동체다. 
 
  대중들에게 다양한 인문학의 기회를 여는 이곳들은 시민 인문학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계절별로 인문학 강좌들이 개설되고, 이를 바탕으로 삼삼오오 모여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특히 수유너머의 경우 그간 여러 연구원들의 노력 끝에 논문을 내고 책을 출간하는 등의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수유너머의 김충한 연구원은 “한 분야만 집중해서 공부하는 전문가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며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얘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제도권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공부가 이곳에서는 가능해진다. ‘시민’을 위한 인문학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들 공동체는 모든 직종과 세대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중학생부터 퇴직 후 노후를 보내는 70대 할아버지까지. 혹은 대학원생부터 예술인들까지 모두 이곳의 학생이다. 최현혜 사무국장은 “사회적으로 갈등이 커져 가는데 이곳에서는 인문학을 통해 세대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식세대와의 교류를 통해, 젊은이들은 인생 선배들로부터 얻은 조언을 통해 부족한 삶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었다. 
 
▲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이 진행되는 성프란시스대학.사진제공 성프란시스대학
 
  소외된 사람들에게 인문학 빛을 밝히다
  인문학 공동체들은 이제 일반 대중을 넘어 사회적으로 외면받고 있던 소외계층에게 시선을 향하게 됐다. 2005년 인문학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의 인문학’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러한 움직임이 태동했다. 인문학자들이 거리 위의 노숙인, 장애인, 수감인들과 인문학을 매개로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노숙인들을 위한 대학이 그 첫 번째 도약이었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노숙인 자활을 위한 방안으로 인문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여느 학교처럼 커리큘럼은 1년 과정으로 철학, 역사, 예술사, 문학, 글쓰기 등의 강연이 진행된다. 노숙인은 박물관, 미술관, 역사유적 답사 등 현장학습도 체험하며 방학기간 여름MT, 졸업여행도 간다.
 
  성프란시스대학 정경수 학무실장은 노숙인에게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교양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밥한끼 해결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고, 하룻밤 자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다 보면 노숙인들은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정경수 학무실장은 “훼손된 자존감은 삶에 대한 마음의 동기를 사라지게 한다”며 “잃어버린 삶의 방향을 인문학 교육을 통해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3년째를 맞는 민들레 예술문학상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을 통해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노숙인은 3개월간 시설에서 지내며 인문학 수업을 듣는다. 후에 시나 소설을 쓰는 공모대회를 거쳐 수상을 하면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정대훈 차장은 “수상의 기쁨과 동시에 거주할 수 있는 집이 생겨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며 “몇몇 경우에는 일반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이 뜻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현재 재정적인 운영은 사람들의 소액 기부나 민간기업의 후원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의 후원이 끊기면 당장의 사업이 어려워질 수 있다. 사람들의 사회적 편견도 장애물이다. “노숙인에게 밥이나 집만 제공하면 되지 왜 많은 돈을 들여 교육을 하냐는 반대 여론에 부딪히는 게 현실이죠.” 정경수 학무실장은 사람들에게 노숙인 교육의 필요성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그럼에도 이 단체들은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의 활동의 반경을 넓히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의 경우 11월에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카페-길’을 통해 노숙인 인문학을 이어갈 계획이다. 정경수 학무실장이 그 의의를 설명했다. “노숙인은 대부분 학력이 초·중졸이며 일찍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삶의 고찰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 없이 코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만 보며 살아가요. 이들과의 사회적 소통을 통해 삶에 대한 성찰과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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