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

  여기 북어가 한 마리 있습니다. 북어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듯 보입니다. 텅 빈 눈과 빳빳한 지느러미, 온 몸이 비틀어진 채. 그렇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그렇게 놓여 있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북어 한 마리 때문에 놀라셨나요? 고등학교 때 국어책을 넘기다가 한번쯤은 읽어보셨을 텐데요. 밤의 식료품 가게에서 말라비틀어진 채 눈이 ‘짜부러진’ 북어를 보며 최승호 시인은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말의 변비증을 앓고 막대기 같은 생각을 하며 딱딱하게 굳어 헤엄쳐 갈 데도 없습니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버린 북어, 아니 우리들의 모습 말이죠. 어딜 가나 현대인의 삶은 문제인가 봅니다. 시인이 주목했던 것처럼요. 때 아니게 북어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도 시인만이 아니었죠.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정신적 허기는 심화됐고 사고는 굳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는데요. 마치 북어처럼 뻣뻣해지고 무감각해진 우리의 모습을 마주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 말라버린 북어들 앞에 해결책처럼 등장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문학’이 바로 그것인데요. 언제부턴가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났습니다.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지표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주까지 인문학에 대해 높아진 관심과 그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기업과 국가부터 대중들까지 인문학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필요성은 다들 공감했지만 인문학을 바라보는 각자의 상은 달랐죠. 이번주는 ‘북어의 인문학’을 바라보는 시각들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한 쪽에서는 굳어버린 현대인들의 뇌를 적셔줄 한 줄기 ‘물’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꼬챙이에 꿰어져 있는 북어들에서 느껴지듯이 획일적인 사고는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나갈 자원이 아니었죠. 지금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을 가능케 할 창의력과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북어의 피부껍질처럼 빳빳해진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적셔줄 ‘가능성’의 영역이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인문학이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수단화·상품화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죠. 현재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자기계발 또는 힐링의 영역에서 대중들의 불안증을 잠재울 뿐입니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문제의식을 희석시키죠. 성과주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적 인재를 원하는 것은 잘못된 허상이라 지적합니다. 현재 인문학은 북어에게 어떠한 존재일까요.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과 굳어버린 사고를 녹여줄 ‘물’이 될지, 아니면 북어의 혀를 마비시키고 취하게 만드는 ‘술’과 같은 것일지 12면과 13면에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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