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이 길어지면서 나에겐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내 취미란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강의계획서를 읽는 것이다. 전공 학점을 계산해가며 듣고 싶은 강의를 정리해보기도 하고, 재밌어 보이는 교양 강의를 찾아보기도 한다. 없어지는 강의에 아쉬워하기도 하고, 새로 생긴 강의가 어떨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상상 만으로나마 재학생이 되어보는 것이다.
 
  강의계획서를 읽다보면 강의계획서만으로도 수업 방식과 교수님의 성격이 그려질 때가 있다. 필요한 교재, 커리큘럼, 강의 목표처럼 강의에 필요한 것만 적는 정석적인 교수님이 있는가하면 나름의 유머를 구사하는 교수님도 있다. 아마 나처럼 많은 학생이 강의계획서를 기준으로 수업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매년 매학기 수강 신청 기간마다 강의계획서가 부실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모호한 추측을 정량적으로 분석한 중대신문 1828호의 기획은 좋은 시도로 보인다.

  학생은 자유롭게 강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이면서 자신이 선택한 강의의 질을 보장받을 수 없는 약자이기도 하다. 이를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이 강의계획서가 될 터인데,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게는 90%에 가까운 강의가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 있다. 과자를 살 때도 무게 당 가격을 비교하고, 가격이 저렴하다면 해외 직구마저 불사하는 합리적 소비가 대두된 요즘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뭘 배우는 지 알 수 없는 강의를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수업을 듣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으니 자유는 자유이되, 강제된 자유이다.

  이는 교수와 학생에게 보장된 권리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교수에게는 자신의 강의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된다. 이와 같은 권리가 있기에 교수는 외압이나 기타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을 상대로 갑의 논리를 펼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선 곤란하다. 교수에게 자유롭게 강의할 권리가 보장된 것처럼 학생에게도 강의의 질, 하다못해 강의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만큼은 보장되어야 한다. 강의계획서는 필수적인 것이지 베풂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진에게 강의계획서를 부실하게 작성해도 들을 사람은 계속 듣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이어진다면 변화는 꿈꾸기 힘들다.

  현 상황을 개선하는 데 중대신문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강의계획서의 부실 비율을 조사한 이번 기획이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정리된 자료를 토대로 학기가 끝난 뒤 학생들이 평가한 강의 점수와 강의계획서의 미흡 정도를 비교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약 부실한 강의계획서와 강의만족도 사이에 전반적으로 유의미한 관계가 도출된다면 현 실태를 개선하는 데 중대신문이 큰 기여를 하리라 믿는다.
문승원 학생
신문방송학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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