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쇄국정책은 없다 
빗장 열고 융합해야 할 때

고고한 인문학은 고독할 뿐 
보통사람들의 인문학이 힘 얻는다
 
▲ 인문학 대중화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는 '벙커1' 특강 현장.사진 김영화 기자
 
  뭐든 시작이 어렵다. 헤엄칠 때는 추진력을 얻기 위한 첫 번째 팔 동작이 가장 힘겹다. 운동할 때도 몸이 운동에 적응하는 처음 일주일이 무척 괴롭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일단 첫 문장을 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글을 이어나가기 수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참으로 반갑다. 뜨거운 관심이라는 첫 번째 발걸음을 뗐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생산성을 녹여줄 인문학 열풍
  통섭과 융합을 강조하는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생산적 인문학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줬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기술을 접목해 ‘애플’을 일궈낸 스티브 잡스처럼 인문학과 다른 학문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 창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카고 대학은 1929년부터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등의 인문학 고전 100권을 모든 학생들에게 읽게 하는 ‘시카고 플랜’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29년부터 현재까지 각 분야에서 최고의 발견 혹은 발명을 이룬 사람에게 수여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80명 이상 배출할 수 있었다. 『인문학으로 스펙하기』(티핑포인트)의 저자인 인문경영연구소 신동기 대표는 “인문학은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 능력을 길러준다”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는 것처럼 다른 결을 가진 학문 간의 통섭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창출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렸던 산업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자기 상품이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의 저자인 주현성 작가는 “재고가 남아도는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적인 지식을 넘어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며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대중의 욕구를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기업의 입장에선 현대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인문학이 그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구름 위에서 세상 아래로 내려온 인문학
  노자의 『도덕경』, 플라톤의 『국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이렇듯 인문학은 어려운 것, 고고한 것으로 여겨져 쉽게 다가가기 힘들었다. 이해하기 힘든 인문학은 대중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신동기 대표는 “인문학의 주체 중 하나인 전문가 집단이 기존에 인문학을 구름 위에 올려놨다”며 “대중과 유리된 고상한 인문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오늘날의 대중 인문학은 어떤 모습인가. “노예가, 다른 게 노예가 아닙니다. 내가 내 뜻대로 못 살면 그게 바로 노예입니다”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철학박사 강신주씨의 말이다. 이처럼 최근의 인문학은 대중의 삶을 쉽고 친숙한 언어로 통찰하며 크나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신동기 대표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학문 본연의 모습이다”며 “그런 의미에서 현실과 밀접한 인문학이 관심을 끄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고 분석했다.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등에 업은 인문학 열풍은 시너지를 낼 수 있게 됐다. 인문학이 집중해야 할 삶의 문제는 어떤 것인지, 인문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등 인문학에 관한 가지각색의 담론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현성 작가는 “진정한 인문학의 질을 높이려면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수요가 필요하다”며 “접근하기 쉬운 인문학이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이고 다양한 담론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대중 인문학의 의의를 밝혔다.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인문학 열풍을 따라 사람들은 인문학 도서를 읽거나 강연을 듣는 등 제각각의 방식으로 인문학을 맛보고 있다. 한 강연에 참석한 한상우씨(37)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며 강연을 통해 삶에 대한 실마리를 얻어갔다.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규모의 인문학 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만난 이들은 인문학 도서를 읽은 뒤 토론하고 시사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등 집단 지성을 실현하고 있었다. 김주일씨는 취업을 위해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다가 인문학의 진정한 재미를 알게 됐다. “모임 활동이 재밌다 보니 나중에는 모임의 성격이 순수한 인문학 독서 모임으로 변하더라고요.” 인문학에 대한 관심, 취업, 석·박사 학위 등 저마다 목적은 달랐지만 인문학을 통해 삶에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된 것은 모두가 같았다. 
 
  이제 기업에서도 각종 자격증, 공인 영어성적 등 스펙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재상의 변화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이선호 학생(생명자원공학부 3)은 “기업에서 인문학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은 기업이 인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며 현재의 방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시형 학생(가명·인문대)도 이에 공감했다. “취업용으로라도 인문학을 접해본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죠. 인문학 공부는 단순히 암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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