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의 후반부 그리고 20살 중반을 맞이하면서 삶은 논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이기는 하나 가장 철저히, 그리고 깊게 알아가는 사실은 바로 고독의 존재를 철저히 알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독은 내가 실존을 인식할 때부터 항상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있었다. 이는 과거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삶의 과정을 관계의 결합, 단절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관계의 끊임없는 결합과 해체 속에서 고독의 존재는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왔다. 지금에 와서야 그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은 대학이라는 공간과 20대라는 시간이 관계 맺음의 템포를 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대 중반 내가 대학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실존한다는 것은 고독에 그 바탕을 둔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관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크게 분류해보자면 가족, 친구, 동료, 연인 정도로 분류하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어 보인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위와 같은 4가지 범주에 대한 관계의 결합과 해체를 반복한다. 삶이라는 시간의 선상에서 결합과 해체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영원의 반증을 보여준다. 즉 이미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타자들은 언젠가 이별을 겪게 된다는 말이며, 이별이라는 종착점으로 향하는 순간 마주치는 각기의 감각 역시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듯 영원은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가올 이별, 영원하지 않은 순간의 감정, 이들 속에서 고독으로 귀결하는 실존의 모습은 우리를 관계에 대한 회의적 결론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인가?

  가족이라는 범주 속에 나와 연결된 관계들은 대학에 들어와 바쁘다는 핑계로 해체되어 갔다. 학업이라는 명분아래, 돈을 벌겠다는 얄팍한 핑계 속에, 신기루 같은 꿈들을 잡기 위한 발버둥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의 관계를 조금씩 해체시켜나갔다. 애석하지만 해체의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 이다. 물리적, 감각적으로도 가장 오랜 관계를 맺은 외할머니와의 관계는 이미 몇 달 전 할머니의 임종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체된 자리 속을 대신한 고독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마저 지워가고 있다. 친구라는 범주 속에 우정을 매개로 지속되어온 동기, 후배, 선배, 동창과 같은 관계는 바쁨의 핑계로 느슨해져 갔으며,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 때문에 갑작스럽게 단절되기도 했다. 동료라는 이름아래, 다양한 목적의식을 향해 나아갔던 동아리 친구들 그리고 일터에서의 동료들과 같은 관계 역시 목적의식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해체 되었다. 그리고 가장 불명확하고, 예측 불허한 ‘연인’의 관계는 결합과 해체를 반복하며, 고독이라는 본질과 더욱 가까워 지게 하였다. 연인과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다른 것들보다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다. 연인의 관계가 더욱 힘든 이유는 해체를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과정은 면역되지 않고 매번 힘들며 고독의 선명도 역시 점점 더 밝아져 온다는 것이다. 또한 역설적인 사실은 고독이 짙어갈수록 관계 속에서 느낀 과거 감정의 조각들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연인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우정, 가족애, 동료애 등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기억들은 고독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희미해지며, 자체적 해체를 준비한다.

  그렇다. 고독과 기억이라는 존재는 시간의 동일선상에서 반비례적 관계를 맺으며 지속적인 운동을 해나간다. 우리는 삶이 지속하는 한 영원히 고독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고독이 우리존재에 완벽히 자리 잡으면 또 다른 관계가 고독을 지워나갈 것이다. 고독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토대가 된다. 즉 고독이라는 우리의 근본기분이 관계의 단절을 예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개현하는 것이다. 24살. 이제는 고독과 친구가 되어야 할 때이다. 고독은 새로운 관계를 예고하는 서막이기 때문이다.

김성문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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