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19년의 세월을 달려 온 사람이 있다. 학부 새내기 시절의 그녀는 자신이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에 복지에 첫 발을 내디뎠던 그녀가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 ‘굿네이버스’의 사무총장이 되어 나타났다. 복지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양진옥 동문을 만났다.
 
 사진 박가현 기자
 
끼가 다분했던 소녀, 학과 수석으로 입학하다

수화 동아리에서 닦은 복지에 대한 마음가짐
 
굿네이버스에서 성취한 못다 이룬 방송의 꿈

진정한 공감을 통해 건강한 사회를 가꾸다
 
  양진옥 동문의 사무실 한 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세계 지도. 지도 위에 찰싹 붙어있는 파랑, 노랑, 초록 색색의 원형 자석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표시를 해 놓은 것인지 호기심이 인다. 기자의 시선을 눈치 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굿네이버스가 복지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국가와 앞으로 사업을 시행해나갈 국가를 나타낸 자석이에요.” 대륙별 권역회의 일정으로 해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던 그녀의 인생 일지를 열어봤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나.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였죠. 부모님은 제가 얌전하고 모범적인 소녀이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딱딱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저와 성격이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에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편이었어요. 활발한 성격의 노는 친구들과 조용한 성격의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죠.”
-적극적인 성격이었는지.
“가만히 앉아 있는 성격은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 반장을 하는 건 기본이었고 중학교 때는 러닝메이트를 구성해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거든요.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전교회장으로 당선됐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연합 중창단에 들어가 단장을 맡기도 했어요.”
-노래 실력이 출중했나 보다.
“노래를 곧잘 했던 편이에요. 모태 신앙이었기 때문에 교회 활동과 연계해서 자주 노래를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KBS <누가누가 잘하나>에 나가 우수상을 받기도 했어요. 음악이 좋아 피아노도 배웠었죠. 하지만 다들 그러는 것처럼 중학생이 되고 음악은 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쳤어요.(웃음)”
-교회 활동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대가족인 저희 집안에서 유일하게 부모님만 기독교를 믿으셨어요. 부모님이 신앙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죠. 교회에 다니는 것을 친척들이 색안경을 쓰고 바라봤거든요. 제게 늘 ‘우리는 크리스챤이니까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시골에 사는 일반적인 아이들과 달리 교회에 딸린 유치원에 다니고 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는 딸이 걱정되셨나 봐요. 또래 아이들의 시기를 받지 않을까 해서요.”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어떤 꿈을 꾸었나.
“초등학교 방송반을 하면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꼈어요.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아나운서와 기자를 꿈꾸게 됐어요.”
-신문방송학과가 아닌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던데.
“우리 세대는 학력고사를 봐서 전기 지원과 후기 지원으로 대학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어요. 전기 지원에서 원하던 과에 불합격했죠. 성적이 낮게 나왔지만 소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상향 지원을 했거든요. 처음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어요.(웃음) 후기 지원을 통해 반드시 대학에 합격해야 하는 상황이 왔죠. 우리 형제들에게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서요. 후기 지원을 받는 대학이 몇 군데 없고 전기 지원에 불합격한 학생들이 몰리는 경향이 있어서 부담이 컸어요. 고민하던 차에 중앙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오빠 친구가 사회복지학과를 추천해줬어요.”
 
▲ 중남미권역회의 참석 당시 아동들과 함께 한 양진옥 동문의 모습.
   전기 지원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양진옥 동문은 후기 지원에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수석으로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학부생 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회복지학과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인간 냄새가 풀풀 풍기는 분위기랄까요.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다들 사회복지에 대한 꿈을 갖고 입학한 사람 같았죠. 저만 빼고 말이에요. 항상 학과에는 에너지가 넘쳤어요.”
-학과에서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처음에는 새침데기처럼 보였을 것 같아요. 저도 만만치 않은 시골 출신이었는데 당시 사회복지학과 사람들 중에는 저보다 걸쭉한 시골내기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을 좋아하는 저의 성격상 금세 적응할 수 있었지만요. 솔직히 저는 학과 생활보다는 전반적인 학교 생활에 열심인 학생이었어요. 특히 수화 동아리 ‘손짓사랑’에서 활동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손짓사랑에 가입한 사연은.
“새내기 시절 학과 선배의 달콤한 말에 이끌려 한 번 동아리에 갔던 게 인연이 됐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회장을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동아리에 들은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 1년은 겉돌았어요. 2학년 때 맹아학교로 봉사를 다녀온 뒤부터 생각이 달라졌죠. 공대생인 동기 남자애가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거든요.”
-충격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동기와 달리 아이들을 서먹해하는 제 모습이 부각돼서 부끄럽더라고요. 사람을 좋아하는 제가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아이들에게 미안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눈에 보이는 활동적인 일만 고집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이지만 조금 더 가치 있는 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동아리 활동만큼 공부도 열심히 하는 편이었나.
“입학할 때까지는 공부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대학에 가서 무너졌어요.(웃음) 동아리 회장을 하다 보니 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다른 학과의 전공 수업을 많이 들었던 탓도 있고요. 학점이 낮게 나올 것을 각오하더라도 듣고 싶은 과목은 꼭 들어야 성이 풀렸거든요. 상대적으로 사회복지에 대한 공부는  소홀했던 것 같아요.”
-배움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한 건가.
“학부생 시절 하지 못했던 공부를 보완하고 정리하는 차원에서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굿네이버스에서 연차가 올라갈수록 전문성을 갖추고 싶은 마음이 커지기도 했죠. 사회복지 전반을 보는 넓은 안목을 키우고 비영리 부문 경영에 관련된 공부도 심도 있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진옥 동문은 졸업과 동시에 굿네이버스에 입사했다. 입사 동기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최연소 사무총장의 일상이 궁금했다.
-인터뷰가 어려울 뻔 했다고.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시즌이다 보니 회의가 많았어요. 미래에 굿네이버스가 어떠한 모습으로 사업을 수행할 것인지 논의하는 중장기 계획회의가 얼마 전에 끝났거든요. 국내 권역별 지부로 워크샵을 돌고 온 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로 해외 대륙별 권역회의를 다녀왔어요. 귀국해서는 일주일 내내 전체 직원들과 회의 결과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어느 정도의 장기 계획을 수립하나.
“매년 중장기 계획회의를 통해 3개년 혹은 5개년의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회의에서 산출된 전략 방향과 변화 지표를 바탕으로 굿네이버스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중요한 회의를 마쳐 홀가분한지.
“회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에요. 1박2일에 걸쳐 보완해야 할 사항들을 간부들과 논의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어요. 중장기 계획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각 부서들이 잘 이행하고 있는지 검토도 해야 하네요.”
 
▲ 양진옥 동문이 기아자동차 마엔델레오 중학교 오프닝 세레모니에 참석해 손을 흔들고 있다.
-평소 국제구호개발 분야에 생각이 있었던 건가.
“제가 꼬마였을 시절의 한국은 국제적인 구호문제나 개발문제에 민감했던 환경이 아니었어요. 88올림픽 전후로 국제화의 바람이 살짝 불긴 했지만 저는 91년도에 대학을 갔기 때문에 올림픽의 영향을 크게 느끼지 못했죠. 어렸을 때는 세계를 품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굿네이버스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4학년 때 학과 게시판을 통해 우연히 굿네이버스를 알게 됐어요. 굿네이버스의 옛 이름이 ‘한국이웃사랑’이에요. 게시판에 붙어 있는 많은 사회복지기관 중에서 유독 한국이웃사랑이 눈에 띄더라고요. 국내뿐 아니라 제3세계의 이웃을 대상으로 복지활동을 수행한다는 것이 신선했어요. 복지와 관련된 부분이지만 모금, 홍보, 회원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그 매력에 반해 1995년에 1기 공채 사원으로 지원했죠.”
-입사해보니 적성에 맞던가.
“마음에 꼭 들었죠. 처음 근무했던 모금팀에선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알릴지, 사업에 사람들을 어떻게 참여시킬지, 어떻게 하면 모금을 더 잘 할 수 있을지 동기들과 매일 고민했어요. 아이디어를 내고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선배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저희가 주도적으로 기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설렘과 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모금팀 다음에는 어떤 부서에서 근무했나.
“모금팀에서 5년 간 근무한 뒤 복지사업팀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모금 일을 하며 염두에 두었던 프로그램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1997년에 IMF 사태가 터지면서 끼니를 굶는 아이들이 늘어나 평소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어요. 모금이 필요한 사회 문제가 결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굿네이버스에서 관련 사업을 수행해보려고 노력했죠. 서울시 교육청과 협의해 학교를 찾아가는 방학 교실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교육복지가 생소한 시절에 시작한 프로그램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전국으로 확산돼 자리를 잘 잡았네요.(웃음)”
-가장 실행에 옮기고 싶었던 사업은.
“학부생 시절부터 언론과 방송을 활용해 침체되어 있는 복지 분야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꿈을 꿔왔어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복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시키고 싶었죠. 모금팀에서 근무했을 당시 동기들과 10년 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저는 이 꿈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사업 초기의 굿네이버스는 작은 단체였기 때문에 방송사와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게 어려웠어요. 될 듯 하다가도 엎어지기 일쑤였어요.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으면서 언젠가는 모금팀으로 돌아가 이 일을 꼭 해내겠다고 다짐했었죠.”
-결국 그 사업은 어떻게 됐나.
“복지사업팀장과 기획실장을 지낸 다음에 나눔사업본부장을 맡게 됐어요. 10년 만에 모금팀에 복귀한 셈이에요. 신기하게도 제가 정말 방송 프로그램을 논의하고 기획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KBS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굿네이버스를 다룬 ‘대한민국은 한 가족’이 100분 동안 방영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실현되니 참 감사하고 뿌듯하더라고요. 제가 방송 분야에서 일했더라도 이루기 쉽지 않았을 꿈이잖아요.(웃음)”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을 텐데.
“함께 입사했던 26명의 동기들이 있었어요. 초창기의 굿네이버스는 전국 지부를 만들어가던 시기라 시련이 많았어요. 현장에 대한 다급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사직서를 내는 동기들을 보게 됐어요. 지금처럼 굿네이버스가 네임 밸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많이들 그만두었죠. 제가 굿네이버스에서 웃으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기들 덕분이기도 했는데 가슴이 쓰라렸죠. 지금은 잘 극복해서 사무총장까지 하고 있지만 허물없이 지내던 동기들이 떠나가니 당시엔 회의감이 들기도 했어요.”
-사무총장이 되고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것 같다.
“모든 부서를 총괄하는 입장이다 보니 세세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파악해서 조직을 잘 운영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깨알 같은 메모를 달고 살아요. 아침형 인간도 되었죠. 낮에는 회의가 있고 저녁에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정리를 할 시간이 아침 시간밖에 없더라고요. 오전 7시 10분이면 회사에 출근하곤 해요.”
 
▲ 양진옥 동문이 중남미권역회의에서 강연 중이다.
-사무총장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제가 특출나서라기보다 굿네이버스였기에 저를 사무총장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굿네이버스 초창기에 입사해 조직의 발자취를 따라 성장한 사원이니까요. 굿네이버스는 자회사에서 훈련을 받고 성장한 사원을 다음번 리더로 내세운다는 기조를 갖고 있어요. 그간 사업을 가장 잘 수행했고 내부 조직에 대해 빠삭한 사람을 리더로 삼겠다는 의미에요.”
-다년간 근무하며 좋은 복지란 무엇이라고 느꼈나.
“항상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이 좋은 복지는 아니라고 봐요. 사회를 바라보며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필요해요. 사회 문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남의 일에 진정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아요. 진정성이 없다면 결국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죠. 어떻게 공감하고 실천해나가느냐를 고민할수록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게 만든 곳이에요. 결국에는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요. 대학에 입학한 뒤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학과를 겉돌았던 시절이 있어요. 다른 학과의 수업을 기웃거리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했고 수화 봉사를 하면서 진실함의 가치를 배울 수 있었죠. 중앙대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경험이에요. 그때의 경험이 원동력이 되어 지금의 인간 양진옥이 있어요.”
  
 
  굿네이버스는?
굿네이버스는 1991년 한국에서 설립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다. UN과 함께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과 권익을 보호하고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일을 이끌어왔다. 1996년에는 국내 최초로 UN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지위를 획득했다. 또한 2007년에는 UN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관련된 사업의 성과를 인정받아 새천년개발목표상(MDGs Award)을 수상했다.
굿네이버스는 굶주림 없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동권리보호 ▲네트워크 ▲사회 교육이란 3가지 사업 방향을 가지고 전세계 33개국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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