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NS에서 기괴한 장면을 보았다. 지난달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에 처참하게 죽은 한 아이의 시신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에는 전 세계에서 보낸 수십만의 ‘좋아요’가 찍혀있었다. 단지 ‘싫어요’ 혹은 ‘슬퍼서다. 자극적일 정도로 슬픈 스크린 속 광경들은 그저 나를 멍하게 만든다. 하지만 몇 초 뒤에 금방 뜨는 ‘맨 위로’ 버튼을 누르면서 뉴스피드의 내용도 내 머릿속도 ‘새로고침’되는 현상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테다.
 
  서두에서 기괴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카메라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현실과는 별개로, 수용자들이 미디어에서 재현된 아픔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디어 속 이미지가 실제의 참혹함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역설이지만 미디어의 이미지가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의 뼈밖에 남지 않은 몸,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참수당한 미국 기자의 모습, 죽기 직전까지 가족들과 주고받은 세월호 속 학생의 휴대폰 장면. 이 모두가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미디어 속 장면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전 국민이 슬픔에 빠져있던 시기를 떠올려보자. TV는 하루 종일 세월호 참사를 방영했다. 당시 집단 트라우마라 보도될 정도로 국민들 모두가 우울에 빠져있었다. 이 와중에 기괴하게 느껴졌던 순간은 모 방송국에서 갓 구조된 학생에게 과도한 인터뷰를 진행한 장면이 브라운관에 떴을 때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당 장면을 비난했고 그 방송국은 해당 보도에 대해 곧바로 사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가 미디어에서 접하는 아파하는 누군가의 이미지에는 항상 날것의 현실을 넘어서는 과잉이 있었다. '가자 지구의 부상당한 아이를 어떻게 해야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클로즈업을 들이대는 사진기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처럼 우리는 현실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표현된 이미지를 미디어로부터 받아들인다. 물론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이는 조금 더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그 아픔을 공감하게끔 하기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 역시 고자세로 고통 받는 피사체를 내려다본다는 점이다. 이미지 속 아파하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상당히 소비적이다. 가령 전쟁 영화의 한 장면과 요즘 뉴스에서 접하는 전쟁의 단면은 화려함의 측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잔인하게 말하면 우리는 스펙터클하게 표현된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슬프고 잔인한 소식들을 향해 그저 클릭하지 않는가. 이는 우리가 타인의 이미지에 대해 느끼는, 연민이라는 감정의 추잡한 이면이기도 하다. 단순한 연민은 그저 시혜에 가깝다. 비행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연민을 받는 순간에 매우 치욕스러워하는 드라마 속의 뻔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 단순한 동정만은 해답이 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고통 받는 타인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미디어 속 범람하는 고통의이미지들을 동정하면서 바라보기만하는 고자세는 다른 이의 아픔을 그저 소비할 뿐이다. 마치 스포츠 신문 속 자극적인 성인물인지 뉴스인지 모를 타임킬링용 콘텐츠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바라보고 연민을 느끼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연민이라는 감정이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열거했던 사례들은 많은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을 얻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잘못된 현실을 바꾸는 게 목표라면 연민을 넘어선 현실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노치원 학생
신문방송학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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