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폰으로 향긋한 추억을 내립니다
  • 김민선 기자
  • 승인 2014.08.31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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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방내
  흑석동 중앙대 정문 앞 거리는 학기가 지남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학교 앞 카페 중 상당수가 한 학기를 유지하지 못한 채 없어진다. 새로 생긴 카페들은 신 메뉴를 들먹이며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떠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우리는 어디서 달래야 하나. 밀물처럼 들어와 이내 썰물처럼 빠져가는 프랜차이즈 카페들 틈엔 다행히도 ‘터방내’가 남아있었다. 터방내는 1982년 생겨나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켜온 흑석동의 터줏대감이다.
 
  터방내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오기 시작했다던 사내는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지금까지도 여기 커피를 마신다. “왜긴, 커피가 입에 맞으니 계속 오지. 가격도 예전보다 조금 올랐지만 다른 데보다 싼 편이야.” 돈이 없을 땐 엽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 정 많은 다방이었다. 
 
  80년대 당시 중앙대 앞 골목엔 터방내 말고도 다방이 여럿 있었다. 가고파, 마당, 꿈나라…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이 곳들은 지금은 사라진 터방내의 경쟁 다방들이었다. “사실 꿈나라 판돌이(DJ)가 끝내줬는데 터방내는 그때도 고고하게 클래식 음악이 나왔지.” 아까 그 사내의 말이다. 커다란 스테레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터방내 지하를 가득 울린다.
 
  터방내의 2대 사장인 주국현, 강경희 부부는 지하에 자리 잡은 터방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 공간엔 빨간 벽돌로 쌓은 아치모양의 칸막이들이 운치있다. 주황 갓에서 나온 등빛이 테이블 위로 하나씩 떨어진다. 요즘 카페들은 2년에 한 번씩 인테리어 공사를 한다지만 터방내 사장님은 지금의 모습을 고집하고 있다. “새로 공사한다 해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요.”
 
  터방내의 벽면은 자세히 보면 낙서들로 빼곡하다.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와서 역사를 남기고 간 흔적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남학생이 헤어진 전 여자친구와 쓴 낙서를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들킨 것이다. 그날 남학생은 벽에 매달려 낙서를 지우고 갔다고 한다.
 
  커피 맛이 좋지 않다면 아무리 분위기 좋은 카페도 30년을 버티기는 힘들다. 터방내의 모든 커피는 사이폰 추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 맛이 좋기 때문에 터방내 사장은 아무리 바쁘고 번거로워도 사이폰 커피 추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커피나 크림 같은 것을 하나도 넣지 않은 원두커피를 시키면 알바생이 사이폰 기구를 앉은 자리로 가져다준다. 과학시간에 쓰는 것 같은 유리 플라스크 두 개가 거치대에 걸려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 모양의 기구다. 아래 플라스크엔 물이 담겨져 있고 위 플라스크엔 거칠게 갈린 원두 파우더가 한 움큼 있다. 
 
▲ 사이폰에서 커피가 내려오고 있다.
  마침 제자들과 함께 터방내를 방문한 중앙대 화학신소재공학부 유재수 교수가 사이폰 커피가 추출되는 과정을 거들었다. 아래 플라스크에 열원을 가했더니 물이 끓어서 위 플라스크에 담긴 원두 파우더를 서서히 적시다 이내 물이 모두 위로 올라갔다. “사이폰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은 추출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자, 이제 불을 빼면 아래 플라스크의 기압이 내려가면서 커피향을 머금은 원두커피가 관을 타고 내려옵니다.” 이렇게 모인 원두커피를 따르면 커피 두 잔이 나온다. 곱게 빻은 원두 파우더를 사용하지 않아 신맛이 적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터방내엔 커피의 종류가 다양해 매번 다른 커피를 시켜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백민소 학생(역사학과 4)은 학교에 놀러온 친척오빠와 친구들에게 학교 앞 명물 터방내를 소개했다. 백민소 학생은 평소라면 산토스나 비엔나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오늘은 콜드모카자와를 시켰다. 나머지 일행은 각각 다른 메뉴로 커피펀치와 하와이나, 과일빙수를 주문했다. 
 
 
▲ 다양한 메뉴를 맛보고 있는 학생들
  테이블마다 공간이 나눠져 있어 옆테이블의 방해 없이 책 읽기에도 좋다. 동그랗게 아이스크림을 띄운 커피인 커피플로트를 시킨 정희인 학생(경영학부 3)은 철학책 한 권을 정독하고 있었다. “터방내에 항상 같이 오는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오늘은 책을 읽으려고 혼자 와봤어요” 친구와 실없는 얘기를 해도 부담 없이 웃을 수 있는 이곳은 흑석동의 아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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