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뚜껑 없는 박물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대학생들의 토론 장소는 물론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예술계 인사들의 아지트였던 대학가의 다방들.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직도 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턱 닳게 다방을 드나들던 대학생이 어느덧 교수가 되어 제자들을 데려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학생시절의 영웅담을 늘어놓는다. 요즘 학생들도 그 기운을 느끼며 괜시리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
 
옛 추억 잊지 못해
다시 찾는 학림다방
 
외국인 손님에게도
이색명소
 
  낙엽이 나뒹구는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는데 옷에 스미는 가을 공기가 상쾌하다. 책 한 권을 팔에 끼고 학림다방으로 향한다. 학림다방은 마로니에 공원 건너편 건물 2층. 나무계단과 고동색의 원목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운 다방이다. “학림에 와서 차 마시면서 음악 듣고 독서도 하는 게 아주 큰 낭만이죠, 센느강도 바라보면서. 옛날엔 여기 개천이 흘렀거든요. 더 이상의 낭만이 있겠어요?” 단골손님 이애주 선생의 말이다. 그가 학림다방을 오가던 걸음에 40년이란 세월도 흘렀다.
 
  서울대 재학시절 학림다방에서 모임을 즐겼다는 그가 오늘은 학회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학회 건물이 건너편에 있어요. 대학시절부터 오는데 여기가 편해요.”  회의는 밤 12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학림다방을 찾아오는 손님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학림다방이 그리는 풍속도는 70년대와 사뭇 다르다.
 
  학림다방은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던 공간이기도 하지만 밤낮 최루탄 가스 속에서 눈물 흘리고 전경들을 피해 다닌 기억이 있는 곳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부르짖던 7,80년대에 학림다방은 학생운동의 본거지였다. 서울의 부림사건이라 불리는 학림사건도 이 곳에서 시작됐다. 1979년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민주화운동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전민학련이 결성됐고 이들의 첫 모임 장소가 바로 학림다방이었던 것이다.
 
  “센느강변에 학생들이 쫙 앉아 있었고 길가에 전경들과 버스가 몇십 대 서있었어요.” 당시 학생운동 행렬 뒷줄에 서있었던 이애주 선생은 그때를 회상한다. “정치외교학과 임진택이 선봉에 나섰는데 그 사람이 풍자를 참 잘해요. 학생대표로 그가 ‘물러가라! 전경 물러가라! 니들이 안 물러가면! 우리가 물러 가겠다!’라고 외쳤지 뭐예요.”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가 자리하던 1956년에 처음 문을 연 학림다방은 서울대 문리대의 ‘제25강의실’로 불리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각계각층 인사들의 청춘 이야기엔 학림다방이 빠지지 않는다. 문단과 언론, 정계 등 사회 곳곳에 학림다방 단골손님들이 퍼져있다고 보면 된다. 작은 장소지만 이곳에서 20대를 보낸 이들이 함께 성장하며 다른 노선을 걷고, 얽히고설켜 근현대사를 만들었다. 학림다방을 1987년에 인수하여 현재까지 이어온 이충렬 사장은 “나는 안 유명한데 유명한 사람들이 찾아와 주니까 그게 좋은 거예요”라고 말한다.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남루한 분위기는 옛날과 똑같지만 바뀌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옛날 분위기를 줄 수 있는 외관은 유지하되 메뉴에서 유행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해야 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스타벅스 2호점이 대학로에 생기는 바람에 우리도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고 블랜드 해 프렌차이즈 커피 맛에 익숙해진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 연수생들이 다양한 음료를 들고 건배를 하고 있다.
  이때 족히 10명은 넘어 보이는 외국인 손님들이 우르르 학림다방 나무계단을 올라왔다. 그들도 이런 옛 취향의 다방은 처음인지 연신 감탄사를 외친다. 한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송별회를 하러 이곳에 왔단다. 한국인 연구원 김신화씨도 “서울대에서 근무하지만 이곳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들은 포도주와 다양한 음료를 시켜놓고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학림다방은 요즘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학림다방이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이곳이 성지와 같은 곳이 되었다.
 
  단골손님들로 하여금 60년 전 향수까지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가진 학림다방. 수북이 쌓인 LP판은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쿠션이 푹 꺼져 앉으면 요철이 배기는 소파는 오래된 다방의 훈장이나 다름없다.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학림다방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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