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가 죽어 역사에 남긴 명패는 “고려충신”이다. 과거 그에 대한 상상이 매우 단순명료했었던 것 같다. 지난 몇 개월째 즐겨보는 연속극에 몰입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감정이입을 하고, 나는 그와 정도전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적잖은 질문을 던졌다. 대체로 답을 못 구했지만 한 가지, 대학자, 외교가, 이성계와 전장에 있던 군인으로서 문무를 겸비했던 정몽주, 신진사대부였지만,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보수로 역사에 남았다. 이렇게 나를 홀린 보수에게 티브이를 보면서,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 계속 물었다. 최영이나 정몽주에게서 읽은 것은 결의나 명분이 아니라, 침몰하는 국가의 충신으로 죽어야 하는 비애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에게 던진 것은 국가라는 물음 같기도 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이란, 작가의 관점이자 시청자에게 권해준 관점이다. 무엇을 위하여-라고 따로 물을 것 없이, 혁명에 성공한 사상가인 정도전의 목표와 동기는 충분히 학습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했는가? 결과론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음에도 나는 정도전과 타협을 못했다. 선거의 시대에 자문한다면, 정도전을 지지할 수 있었느냐에 나의 대답은 아니란다. 다시, 결과론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었어도, 새 왕을 세운 역사의 기록이 존재하고 결과를 알고 있어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계속 정도전을 믿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가를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현실정치에서 본 적이 없는 명분과 이상, 신념을 수용하지 못하고, 어지간히 패배주의적 회의에 절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가 설치한 덫에 내가 제대로 빠진 것인지 모르겠다. 정치적 대리만족이라는 평판을 부정할 수 없다.
 
  2014년 잔인한 봄이었다. 그렇다고 이 봄에 목격한 비극에서 놀랍거나 새로운 장면은 없었다. 항상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추하지만 못 본 체 해야 했고, 내 일이 아니라면 나서지 말아야 했고, 손해 보지 않도록 피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몸에 각인된 암묵적 현장매뉴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목격하고 있는 일련의 장면들의 종합적 조합이 잔혹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고, 이 앙상블이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이라는 민낯으로 드러났다는 점에 당황하고 있다. 우리가 타성으로 묵시했던 도덕적 해이와 물질만능의 폐해를 어디부터 걷어낼 수 있을지 감이 잘 안 잡힌다. 우리 국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인지도 막막하다. 
 
  언제부터인가 국가나 정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굳이 왜냐고 묻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래서 자성과 변화에 대한 열망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 국가에 대한 담론이 막혀있다면, 2014년 국가의 실체에 몸서리치고 선거를 치르고도, 대학에서조차 국가와 그것이 수반하는 정치와 정책, 교육과 기회, 법과 사회시스템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가 어렵다면,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 아쉬우면 드라마의 노예로 살면 되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고 싶은 것만 기록하고, 드라마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김시연 교수
물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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