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비싼 음식을 사 먹어도 집밥이 최고다.’, ‘배가 너무 고파 편의점 음식으로 배를 채워도 집밥만큼 든든하진 못하다.’ 집밥? 집밥이 과연 무엇일까.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기자에겐 집밥이란 개념이 낯설다.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 덕분에 우리집엔 밥냄새가 나지 않는다. 허기진 부엌은 매 끼니마다 옆집에서 스며든 갓 지은 밥냄새로 대신 채워진다. 어렴풋이 기자는 밥냄새가 풍겨오는 그 ‘시간’을 집밥이라 기억하고 있다.
 
  최근 집밥이 그리워졌다. 배가 고파서도, 옆집 밥냄새를 맡고 싶어서도 아니다. 남들처럼 아무런 고민 없이 편안한 자세로 좋아하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웠다. 기자는, 아니 우리는 너무 시간에 쫓겨 왔던 것 같다. 
 
  한 달 전쯤 박민규 소설가를 만났다. 취지는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했던 1시간 남짓한 시간 속에서 기자는 안절부절못했다. 이유를 꼽자면 첫째로는 인터뷰 상대로서 박민규 소설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 두 번째로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원하는 만큼의 기사를 뽑아낼 수 있는가 등 사사로운 것들이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뒤엉켜 놓자 박민규 소설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 기자에게 박민규 소설가는 입을 뗐다. “겁쟁이구나.” 이어 그는 “녹취를 끄고 편하게 인터뷰하자”고 했다. 서로의 질문과 대답에 귀 기울이며 있는 그대로 솔직해지자는 것이었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녹취를 끈 그 순간부터 기자는 좀 홀가분해졌다. 집밥을 먹는 시간처럼. 오히려 배짱이 두둑해졌다고나 할까. 인터뷰가 망하면 망하는 대로 가는 거고 잘되면 잘됐으니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자고 싶으면 자면 되는 거고 글을 쓰고 싶으면 그 언제가 됐든 쓰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시간 쫓겨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라 그는 말했다.
 
  왜 우리에겐 그런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완벽해지지도 않을 거면서 죄책감에 시간만 붙들고 있는지…. 어쩌면 나머지 동료 기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문 속엔 여유와 편안함이 녹아있지 못했다. 한때는 그것이 날카로운 시선이라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착각이었다. 이젠 중대신문도 독자들에게 집밥을 먹는 시간처럼 편안하게 다가갔으면 한다. 그 중심엔 여유를 부릴 줄 아는 기자의 요령도 중요하겠으나 그것을 또 자연스레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독자의 여유도 필요하다. 우리 모두에겐 여유를 부릴 시간과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며칠 전 기자는 어머니 생신상을 차려드리며 손수 미역국을 끓였다. 한 숟갈 뜬 어머니의 입에선 “싱겁다”는 말이, 반대로 기자의 입에선 “짜다”는 말이 나왔다.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겨 살다 보니 서로의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는지 바라보지 못했다. 미각이 둔해질 정도로 멀어진 시간 속에서 이제는 조금씩 여유를 부리며, 서로의 시간차를 좁혀가야겠다. 
 
최아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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