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조직이지만 교육기관만도 아니고 연구기관만도 아니다. 이미 알려진 지식을 정해진 교과 과정에 따라 전달하는 다른 교육기관에서와는 달리 대학에서는 교수의 학문 탐구의 결과인 새로운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국가 정책이나 신제품의 개발을 목적으로 미리 주어진 과제를 연구하는 국책 연구소나 기업 연구소에서와는 달리 대학에서는 오직 교수의 자유 의지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를 진행한다. 

  이런 대학에서 학문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표준화 공정을 거친 이미 알려진 지식을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주입하고 있다면 그런 곳을 대학이라 할 수는 없다. 1년에 논문 편수 몇 편이라는 수치화된 목표를 정해놓고 그에 맞추어 논문을 생산하는 논문 생산자, 권력의 구미에 맞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어용학자, 대학의 학문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장사치들이 있는 대학을 대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세속적인 동기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학문적 소신과 지적 욕구에 따라 과거의 지식을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면서 이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는 대학만이 제대로 된 대학이다. 

  제대로 된 대학이 되려면 교수가 우선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대학을 이끄는 교수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교수란 말의 뜻 그대로 먼저 나서서 말하는 것이다. 대학 교수를 뜻하는 영어나 독일어의 professor(또는 불어의 professeur)는 ‘앞으로’란 뜻의 ‘pro’와 ‘말하다’라는 뜻의 ‘fess’,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or’의 합성어로서 이 말은 먼저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수란 학문 공동체의 선도자로서 학문 탐구를 통하여 진리를 먼저 알고 자신이 안 진리를 학생들에게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professor’라는 말과 연관된 영어의 ‘profession’이란 말은 전문직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의 뜻은 나서서 말하는 행위, 즉 공언이다. 교수가 하는 공언의 출발은 대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이다. 

  그러나 교수인 나는 교수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다. 의와 참, 즉 정의와 진리를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대학에서 한 학생이 대학은 정의를 추구하는 곳이라고, 그렇지만 이제 그 대학에 정의는 없다고 선언하면서 대학을 떠나버릴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육 과정을 공장의 제품 생산 공정과 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기구가 생겨날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비판적 지식인 양성이라는 대학의 사명에 꼭 필요한 강의가 차근차근 없어질 때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학문적 교류와 토론이 불가능한 대규모 강의가 대학 전체로 퍼져갈 때에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교수인 나는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 이름만 교수이지 교수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내가 참으로 부끄럽고 참 담하다. 나를 아는 학생이 나를 모른 체 하더라도, 나를 보고 당신을 교수라고 부를 수 없다 하더라도,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더라도, 아니 침을 뱉으며 지나가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고 지금도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영어영문학과

고부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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