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남주 안과의사(의학과 79학번)
  • 김민선 기자
  • 승인 2014.06.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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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눈물 걷어낸 희망의 빛

  눈동자를 통해 우주를 본다. 문남주 동문은 안과 의사 생활 30여년 중 20년을 저시력 클리닉에 바쳐왔다. 약이나 수술로도 치료가 안돼 울면서 그녀를 찾아온 환자들은 재활훈련을 통해 밝은 시야를 되찾아 갔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저시력 치료 분야를 홀로 개척하는 힘든 시기를 지나 그녀는 환자들에게 빛을 보여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김민선 기자 somi@cauon.net

사진 최아라 기자

 
 
환자의 말속에서 
병의 답을 얻는 
전인적인 진료

국내 최초로
시각재활의 길 열어
한국판 라이트하우스 꿈꾼다
 
 
  문남주 동문의 연구실은 봉사상과 연구상이 담긴 액자들로 벽면이 빼곡하다. 가족과의 오붓한 사진과 더불어 마르퀴즈 후즈 후 인명사전과 긴급구호 파견 수료증까지. 의사가 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그녀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요즘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
“정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봉사활동을 하러 국내 산간지역이나 해외 오지로 떠난다. 병원교수들은 교육, 연구, 진료 세 가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는 힘들다. 병원에서는 홍보실장도 맡고 있고 밖에서는 신경안과학회 회장과 실명예방재단 상임이사로 있기도 하다. 병원 밖에서 이것저것 엮인 게 많다.”
 
-봉사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처음 봉사활동을 한 건 예과 2학년 때였다. 당시 중앙대 사회복지관에서 방학 때마다 자폐아동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단순히 자폐아동들을 보살펴 주고 소풍에 데려가는 봉사활동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소소한 봉사활동으로 시작해 학과 차원의 진료봉사에 참여하면서 의료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오지 봉사활동은 어디로 다녀왔나.
“미얀마 슬럼지역의 교회에 가서 선교와 진료를 함께 했다. 그곳 사람들 대부분은 안경 같은 보조 기구조차 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백내장에 걸렸지만 수술을 못한 사람도 있고 눈에 고름이 차서 내용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는 등 상상초월이었다. 맹인학교를 방문해서 아이들을 진료하고 저시력 평가기구를 기증하기도 했다.”
 
-시각은 삶의 질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는 것 같다.
“미얀마에서 병원은 찾기 힘들 뿐더러 환자들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진료 조차 받지 못한다. 시각과 삶의 질이 비례한다는 걸 미얀마에서 새삼 느꼈다. 가난하면 시각에 있어서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본인에게 봉사는 인생의 몇 할이나 차지하나.
“의사로서의 인생에서 봉사는 반이다. 아픈 사람을 대하는 것 자체가 봉사라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환자를 보는 것 자체가 ‘무슨 봉사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봉사라고 생각한다.”
 
-저시력 환자를 돌보는 것도 봉사의 영역에 포함되는가.
“저시력 클리닉은 절대 돈벌이가 되는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치료 시간은 길지만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수가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자 치료를 위해서 걸리는 시간이 일반 환자의 열배는 된다. 우리나라에 없던 분야이기도 해서 의료행위 자체를 봉사라고 본 것이다.”
 
-다년간의 봉사활동이 태준안과봉사상을 통해 결실을 맺었다.
“안과학회에서 태준안과봉사상을 받았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20년간 계속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상금으로 받은 돈은 실명예방재단에 모두 기부했다.”
 
 
  문남주 동문이 저시력 치료에 뛰어든 90년대 중반만 해도 저시력 치료는 아무도 뛰어들지 않는 황무지였다. 저하된 시력은 약이나 수술을 통하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게 당시 통념이었다. 그러나 저시력 클리닉을 통해서 시각도 재활이 가능하다는 개념이 문남주 동문을 통해 국내에 도입되었다.
 
-국내 저시력 클리닉의 선구자다.
“1994년 성애병원에 처음 저시력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지만 정식으로 저시력 클리닉을 개설한 곳은 95년 국립의료원이다. 국내에 저시력 클리닉이 개설된 건 그때가 처음이어서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환자가 왔다. 특히 맹인 학교 아이들이 많이 오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저시력 치료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저시력 치료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중대병원 레지던트 시절에 나의 은사님이신 중대병원 안과과장 구본술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됐다. 구 교수님을 통해 저시력 치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시각재활이 가능하다는 걸 안 이상 안과의사로서 국내에도 클리닉 도입이 시급해 보였다. 그래서 93년도에 미국안과학회에 가서 본격적으로 저시력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분야에서 혼자서 저시력 클리닉을 개설하고 홀로 진료하게 됐다.”
 
-너무 소외된 의료분야였던 것 같은데.
“안과는 전안구, 망막, 안성형, 소아안과 등 서브그룹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하나를 전문 분야로 택해야 했는데 저시력 치료만 해서는 안과 의사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시력 클리닉 분야와 함께 소아안과 분야를 맡기도 했다. 레지던트 시절 어떤 여의사가 아이들의 눈을 보고 ‘twinkle twinkle tiny star’이라며 아이들의 눈을 작은 별이라고 표현했다.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아 소아안과를 택했다.(웃음)”
 
-국내에서 저시력 치료술을 배우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저시력 분야를 가르쳐 주는 곳이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연수과정을 밟아야 했다. 96년도엔 미국 ‘라이트하우스’라는 시각장애자를 위한 연구 교육기관에 다녀왔다. 라이트하우스 미팅에 참석했을 당시 저시력 클리닉이 아프리카 가봉에는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은 저시력 분야를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의 저시력 클리닉은 어땠나.
“미국안과학회에 가서 강의를 들었는데 수술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재활을 통해 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치료가 아닌 시각재활을 통해서 말이다. 망원경이나 돋보기를 통한 시각재활법을 우리나라에도 도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선진국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면.
“일본과 스웨덴에서 연수를 거친 뒤 미국의 하버드 부설 클리닉에도 들어가게 됐다. 그들의 의료 기술은 크게 좋기보다는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장애자가 발생했을 때 등록과 전달체계가 잘 돼있어 장애자들에 대한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더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지만, 의료 선진국의 장애인들은 굉장히 밝고 자존감이 높아보였다. 장애를 장애로 생각하지 않는 외국인들의 사회인식이 놀라웠다. 몸이 조금 불편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저시력 질환의 추세는 어떤가.
“한국사회가 점점 노령화 되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 당뇨나 고혈압이 생기면 황반부변성같은 안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많이 발생한다. 최신 치료법이 많이 나왔지만 궁극적으론 안보이게 된다.” 
 
-이를 해결할 의료법을 연구하는지 궁금하다.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의 시력을 어떻게 재활시킬 것이냐가 내 연구의 초점이다. 이에 대해 중심 외 주심, 즉 중심 시력이 망가졌을 때 그 외의 망막을 이용해서 보게 하는 재활법을 연구 중이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한 후 문남주 동문은 연구실로 돌아와 시각재활 연구를 준비한다. 한때는 전공서적을 들고 중앙대 교정을 거닐던 의학도였지만 이제는 모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들에게 의술을 전수한다.
 
-학창시절 의사를 꿈꾸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할아버지가 한의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는데, 사상의학을 양의학에 접목시키면 노벨상을 탈거라고 줄곧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말씀이 인상 깊었던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그림 일기장에다 노벨의학상을 타겠다고 써놓고 반짝반짝 빛나는 노벨상을 그렸던 게 기억난다.”
 
-안과 진료를 할 때 어떤 사명감으로 임하는가.
“보다 잘 보이고 편안한 눈을 만드는 것이 내 책임이다. 약시인 아이들이 더 잘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신체 모든 부분이 평형을 이루듯 이 아이들도 정상적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수술할 때의 마음가짐은 또 다를 것 같다.
“수술은 나한텐 매주 금요일마다 벌어지는 일이지만 환자에겐 일생에 한 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환자 한명 한명에게 신중을 기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아니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매번 환자의 눈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눈은 작은 우주다. 유일하게 혈관과 신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관이 바로 눈이다. 어떤 사람은 손만 보고 몸 전체를 안다고 하는데 안과의사들은 눈을 보고 안다. 그래서 나는 눈을 작은 우주며 작은 신경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정말 민감한 곳이고 볼수록 매력 있다. 주먹만 한 구형의 안구에서 전신질환을 포착할 수도 있다.”
 
-안과의사로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저시력 분야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같이 저시력을 전공하는 의사들이 별로 없었다. 남들도 잘 알아주지 않았고 돈도 되지 않았다. 당시엔 내가 너무 마이너라(minor)는 사실이 너무나 불편했다. 게다가 나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에게 찾아 와서 울면 나까지도 우울해지더라.”
 
-지금은 권위자로 우뚝 서지 않았나.
“지금은 그때의 심정을 극복했다. 당시엔 끝까지 가겠다고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처음 이 길을 열어주셨던 구본술 교수님이 격려를 많이 해주었다. 나에겐 은인이다.”
 
-진료했던 환자 중 가장 보람을 느꼈던 케이스는.
“내가 국립의료원에서 시작하고 얼마 안돼서 봤던 학생인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 특수교육 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 학생도 시각장애자인데 나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가 인사를 하러 왔을 땐 정말 기뻤다.”
 
 
  집안에서 의사가 한 명 나왔으면 하는 바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문남주 동문. 의사가 되기까지 그녀를 이끌어 주는 사람은 은사 구본술 교수와 그녀의 아버지인 문병직 교수다. 특히 중앙대 총장을 지냈던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했다.
 
-중앙대 의대에 진학한 것은 중앙대 총장이었던 아버지의 권유였나.
“그렇다. 당시엔 중앙대 의대가 신생학과였기 때문에 비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의대 9회 졸업생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교수였기 때문에 늘 나에게 선생님이 되라고 가르치셨는데 의사이면서 선생님이라는 것은 결국 의대 교수 아닌가.”
 
-아버지가 본인에게 미친 영향이라면.
“아버지는 새로 오는 21세기엔 자격증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고 강조하셨다. 또 여자도 남자에 준하는 사회활동을 하는 사회가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셨다. 큰딸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지금도 늘 공부하라면서 논문은 몇 개 쓰냐고 물어보신다.(웃음)”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환자를 볼 때 증상으로 보지 말고 전인적으로 보라는 얘기를 한다. 눈은 그 사람의 신체 상태를 반영한다. 질병이 꼭 눈 안에서 국소적으로 발병한다는 말이 아니다. 쉽게 그 증상만을 보고 치료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인간 전체를 보고 진료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의사가 되길 소망했나.
“예과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실력 있고 존경받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30년이 흐르고 나서 생각해보니 존경받는 의사가 아니라 존경하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동안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환자는 나를 처음 보더라도 나는 계속 환자를 보다보니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있다.”
 
-환자를 어떻게 존중해준다는 것인가.
“환자가 진료를 오면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환자를 볼 때 스토리테이킹(story taking)이라는 게 있는데 환자 말을 듣다 보면 그 병의 팁이 나온다는 뜻이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평소에는 상대방이 말할 틈을 주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자는 다짐으로 환자를 존중해야겠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고향이다. 중앙대 사택에서 태어나 20년을 흑석동에서 살았다. 중대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해 중,고등학교만 강 건너 다닌 후 6년 만에 다시 중앙대로 돌아왔다. 중앙대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이수하고 중대교회에서 세례도 받았다. 중대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나서 현재는 중대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중앙대는 정신적인 고향일 뿐만 아니라 정말 나의 고향이다.”
 
 
  저시력 클리닉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약물치료나 수술적 처치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시력이 안 나오는 상태를 저시력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교정시력 0.3 이하를 저시력으로 정하고 있다. 환자들은 낮은 시력, 협소한 시야, 혹은 큰 암점(scotoma,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질 수도 있고 눈부심이나 비정상적인 색깔 인식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나라에서 저시력 환자는 대략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특히 65세 이상의 노년층에서 흔하다. 대부분의 저시력의 원인은 황반변성, 백내장, 녹내장과 같은 질환과 당뇨병과 같은 만성 질환 때문이다. 안구 외상이나 출생 시 장애 때문에 저시력이 되기도 한다. 
 
  저시력 클리닉의 목적은 저시력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불편을 줄여서 개인의 독립성을 유지해주고, 생산성 향상을 통해 생활의 질적 개선을 이루게 하려는데 있다. 특히 시각재활 클리닉이란 저시력자들의 시기능 평가 및 시각재활 치료를 담당하는 안과의 전문 분야다. 이미지크기 확대, 적절히 밝은 조명과 대비의 증가, 남은 시기능의 최대한 활용(중심외 주시점의 활용), 일상생활 동작에 대한 적응 훈련, 생활상담 등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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