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황인범 동문은 전공과는 무관하게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나무 만지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97년 순천 선암사에서 목수로 입문한 그는 전국 곳곳의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목수와 도편수로 일해 왔다. 그러던 2010년 우연한 기회에 서촌 한옥의 대수선 공사를 맡게 된 이후 지금까지 10채에 가까운 한옥이 그의 손길을 거쳐 도시형한옥으로 재탄생했다.
최현찬 기자 hcc@cauon.net
사진 박가현 기자
   
 
목수학교도 없던 90년대 
몸으로 부딪히며
목수의 기반을 다지다
 
한옥 수선 5년차
서촌의 지역성이 반영된
한옥을 수선하다
 
 
 듬직한 외형에 서글서글한 인상, 누가 봐도 목수의 모습이었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서촌 일대에는 그와 같은 인상의 목수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옥의 전통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촌에서 5년째 한옥 대수선을 맡고 있는 황인범 동문. 7번째 대수선 한옥인 ‘어락당’의 보수과정을 담은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를 출간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재 작업 중인 한옥이 있는가.
“2010년부터 한옥을 짓기 시작해 현재 10번째 한옥의 보수공사를 맡고 있다. 신혼부부의 의뢰를 받아 공사를 시작한 이번 한옥은 겉모습은 도시형한옥인데 내부는 일반 주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집이다. 의뢰자인 신혼부부는 현재 신혼여행 중이다.(웃음)”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를 출간했는데, 책을 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다면.
“그동안 한옥을 개념적으로 소개하는 책들은 간간히 출판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이 한옥의 철학적인 가치나 한옥을 짓는 물리적인 과정을 담은 내용뿐이었다. 한옥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한옥의 공사 현장에선 무슨 일들이 오고 가는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목수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인가.
“건축 현장에서 건축주체들 간의 관계 그리고 현장에서 오고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한옥이 지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한옥을 칠하는 사람은 어떤 연유로 인해 칠을 하게 됐는지, 유리를 만드는 노동자는 어떻게 한옥의 유리를 담당하게 됐는지. 내 책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옥 건축자들의 아름다운 관계가 ‘어락당’이란 하나의 완성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지금까지 작업한 10채의 한옥 중에 ‘어락당’의 보수과정을 담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락당 이전에 지었던 6채의 한옥들은 서촌의 지역성을 고려하지 않은 집들이었다. 그전의 한옥들과 같이 어락당도 집인 건 마찬가지지만 더욱 완숙한 공법을 터득해 지은 게 어락당이다. 아직도 완벽한 공법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방법론에 있어서 어락당을 통해 완숙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어락당 보수과정이 완벽했단 뜻인가.
“어락당은 내가 도편수로서 처음으로 서촌의 노동자들과 함께 지은 집이다. 이 집을 지으면서 본격적으로 마을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사실 어락당을 짓기 전까진 서촌 동네 기술자들의 능력을 간과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락당을 지으면서 서촌의 기술자들만이 이 지역의 특색이 반영된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파우저 교수의 끊임없는 논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한옥이 어락당이다.”
 
 
 목수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18년차. 목수학교도 없던 90년대 그의 학부전공은 나무 만지는 업과는 거리가 먼 독어독문학이었다. 농가 출신의 인문학도가 서촌의 도편수로 거듭나기까지의 배경에는 취업과 꿈 사이에서 고민하던 서울유학생의 애환이 녹아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목재를 다루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
“나는 전라남도 벌교의 농가 출신이다. 어렸을 때는 목수 업에 대해 생각조차 안했지만 농가 출신이어서 노동하는 일에는 굉장히 익숙했다.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도와 농사를 하다 보니 일찌감치 노동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농업이나 목업과는 전혀 무관한 중앙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다.
“목사가 되고 싶어 인문대에 진학했지만 군대를 전역하고 인생관이 바뀌었다. 지방 출신 학생들은 보통 군대를 전역하면 공무원 시험을 많이 보는 편이었다. 우리 집안도 내가 공무원이 되기를 원해서 나도 자연스럽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취업을 위해 공부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지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목수의 꿈은 언제부터 갖게 된 것인가.
“지금의 학교 앞 151번 버스가 당시에는 84번이었다. 그때는 놀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84번 버스를 타고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러 인사동을 자주 찾곤 했다. 당시 인사동 경인미술관 앞에 있던 벤치에 앉아 한옥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대학시절 유일한 낙이었다. 84번을 타고 인사동을 다니면서 전통문화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목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인가.
“가난한 시골 출신 유학생이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가다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많이 돕다 보니 노동하는 게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었다. 수많은 노동 현장을 다니면서 진정으로 고귀한 노동은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때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노동에 대한 고민이 맞물리면서 나무를 만지는 일은 정말 고귀한 노동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목수학교도 없던 시절, 꿈을 어떻게 이루려고 했나.
“대학교 4학년 때 창덕궁 보수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그때도 역시나 84번을 타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당시 공사 책임자에게 일을 할 수 없냐고 물어봤다. 떨어졌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가방끈을 숨겼어야지’라고 하더라. 이후에 어디서 목수 일을 배워야 할지 모르겠어서 지방의 절이란 절은 다 찾아다녔다. 그러다 97년도 가을에 찾은 순천 선암사에 도착하니 6,70대 노인들이 지붕 위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 나무 다루는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다음 날부터 나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의 첫 스승을 두게 됐다.”
 
-순천 선암사에서 처음으로 기술을 배운 것인가. 
“사실 그분들한테는 기술보다는 노동을 하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다. 노동이 업이기보다는 운명 그 자체였던 그분들의 노동에선 전통문화에 대한 사명감이나 장인정신 같은 건 없었다. 그분들의 노동은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술 이전에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는 목수들을 첫 스승으로 둬서 첫 단추를 굉장히 잘 꿰맬 수 있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떻게 충족시켰나.
“목수들의 세상에서 소속을 옮기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다. 기술을 배우고픈 갈증에 목말랐던 시절 당시 속했던 팀에 목수님 한 분이 새로 오셨다. 수도권 출신으로 세련된 기술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순천 선암사의 노인 목수들이 노동의 정신적 가치를 가르쳐주셨다면 그 목수님은 내게 기술적인 부분을 충족시켜주셨다. 스승님한테 욕을 바가지로 들으면서 서서히 목수 일에 익숙해졌다.”
 
-97년도 순천 선암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문화재 수리현장을 다녔는데.
“처음부터 문화재를 수리하고 싶었기보단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목수를 시작했던 90년대는 한옥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3,40년 동안 생활한옥에 대한 수요가 바닥을 치면서 한옥 장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지방에 있는 문화재를 수리하는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 목수를 시작했던 나도 문화재 수리현장을 다니면서 지방 곳곳의 일을 찾아 다녔다.”
 
-목수를 시작으로 공사현장을 책임지는 도편수로 일하기도 했다.
“목수들의 세상에서 10년 정도 일을 하면 집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턴 수년 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목수들을 이끌 정도의 지휘권을 갖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도편수를 맡은 건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목수 일을 할때는 내가 맡은 부분만 잘 하면 그만이었다. 도편수를 하게 되면 집을 짓는 현장을 전체적으로 봐야 해서 여러모로 애를 먹었다.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건축주체들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것도 도편수의 몫이다.”
 
-문화재를 주로 수리하던 목수가 생활한옥 수선은 어떻게 시작했나.
“문화재 수리작업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집을 지어도 항상 텅 빈 집만 짓게 되니 늘 허무한 기분이었다. 요사채(스님이 사는 공간)나 법당처럼 사람이 사는 집을 만드는 건 재밌었지만 텅 빈 문화재를 만드는 데서 내 일에 회의감을 느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짓는데 내 능력을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촌에 오게 된 건가.
“2010년도에 가평 현등사 2층 목탑 수리를 마친 이후였다. 존경하던 주지스님께서 ‘너는 이 목탑을 힘들게 지었으니 앞으로 일이 없어서 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사는 생활한옥을 짓고 싶었던 시기에 때마침 서울에서 오신 손님 두 분이 한옥을 수선해달라고 내게 의뢰를 하셨다. 평생 일을 찾아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서울 서촌에 정착하고 생활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첫 한옥 수선에 대한 감회가 궁금하다.
“생활한옥을 지었어야 했는데 문화재에 가까운 한옥을 지어버렸다. 문화재 수리 현장만 다녔던 습관 때문인지 서촌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옥을 지었다. 서촌 한옥들은 1930년대 이후 대대로 내려오는 도시형한옥인데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사용하던 창호를 서촌의 한옥에 넣는 등 서촌과는 이질적인 한옥을 지었던 것 같다.”
 
-서촌의 지역성에 대한 고민을 할 법도 한데.
“몸으로 부딪히면서 한옥을 한 채 한 채 짓다보니 서촌의 한옥에 대한 느낌을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내가 도편수니까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집을 짓는 편이었다. 이제는 서촌의 노동자들과 함께 이 동네만의 지역성이 반영된 한옥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 설악산 백담사 요사채 그리고 가평 현등사 2층 목탑까지. 전국 곳곳의 문화재가 황인범 동문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수리형태를 띠게 됐다.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그의 역할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그의 역할은 전통한옥에 현대적인 감각을 부여하는데 있다.
 
-건축에 있어서 본인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모든 건축은 설계와 시공으로 나뉘어져 있다. 나는 시공을 하는 사람이다. 도편수로서 머리 속에 생각해두는 설계도가 있긴 하지만 설계자들이 짜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시공하는 게 내 역할이다. 내가 생각해둔 설계도가 있다고 해서 내 설계도를 고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주체들 간의 인간관계가 건축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건축현장에서 건축주체들 간의 협업이 중요할 것 같은데.
“건축주체들이 협업해야 좋은 집이 나올 수 있다. 이들 간의 합의 하에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이 나온다. 현장 분위기에 따라 건축주체들 간의 신뢰가 뒷받침되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생활한옥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시너지 효과가 현장에서 발휘될 때는 도편수인 내가 현장에 없어도 된다.(웃음)”
 
-한옥의 단점으로 불편한 화장실, 부족한 수납공간 그리고 취약한 난방시설이 꼽힌다.
“현대인들의 생활습관을 고려했을 때 전통한옥이 불편한 건 맞다. 과거에 내 역할이 문화재를 보존하는 역할이었다면 지금 내 역할은 문화유산을 현대 생활습관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현대적인 디자인과 공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옥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다.” 
 
-전통한옥을 도시형한옥으로 재탄생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통한옥을 의뢰자들의 요구에 맞춰 도시형한옥으로 대수선하는 게 내 일이다. 전통한옥은 구조 자체가 전통적인 구조여서 구조의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 속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부여하는 게 내 작업의 가장 큰 관건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미감을 찾아 한옥 개조를 의뢰한 건축주들의 입장에선 지나친 현대식한옥은 달가운 집이 아닌 것 같더라.” 
 
-의뢰자들의 요구조건에 따라 한옥의 형태가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요즘은 건축에 있어 맞춤제작 방식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 생활한옥도 건축주의 취향에 따라 형태가 굉장히 다변화됐다. 건축주가 집을 보는 관점과 생활방식이 한옥 개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락당의 경우 건축주인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화장실을 크게 만들어주길 원했다. 건축주의 구미에 맞게 서양인 특유의 생활 특성에 맞게 세탁실도 크게 만들었다.”
 
-근 몇 년간 한옥이 대중화되고 있는데, 도편수로서 이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이 서촌을 찾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빨리 현대화돼버린 우리 사회에서 잃어버린 기존의 가치를 전통 문화유산을 통해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우리의 습성에 가장 어울리는 공간이자 역사적 문화유산을 찾는 건 한국인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도편수로서의 계획은 무엇인가.
“초가마을 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다. 초가는 건축비가 저렴하면서 집들이 붙어 있으면 지붕을 보수하기도 쉽고 친환경적이기까지 하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 한옥 교회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절은 너무 많이 지어봤다.(웃음)”
 
 
당신에게 중앙대란?
“가난한 시골 유학생이었던 나에게 중앙대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관문이었다. 목수를 꿈꿨던 나의 세계는 한국이 전부였다. 그 세계를 자신 있게 가게 만든 관문이 상경생활을 시작한 중앙대였다. 서울생활이 힘들었지만 중앙대를 통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어락당이란
‘말을 즐기는 집’이란 뜻의 ‘어락당(語樂堂)은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인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경복궁 옆 서촌 체부동에 직접 마련한 작은 한옥이다. 평소 1930년대 서촌 한옥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던 파우저 교수는 서촌 이웃인 황인범 동문에게 어락당의 대수선을 요청했다. 황인범 동문의 대수선 끝에 어락당은 아래와 같은 모습의 도시형한옥으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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