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꼭대기에 남겨진 가장 낮은 마을
  • 하예슬 기자
  • 승인 2014.05.2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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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마을
 
1960년대 우리 사회는 무분별한 도시화를 겪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도시의 달동네나 좁은 골목길은 불도저가 점령해 버렸다. ‘외관상 아름다운’대한민국을 만들었을지 모르겠으나 한편으로는 재개발의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그토록 거센 재개발의 바람이 백사마을만은 빗겨 나갔다. 여전히 서울의 한 구석에서 1960년대 주거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이곳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린다. 그러나 2008년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며 언제 철거될 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불암산 자락에 자리 잡은 그곳의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의 동북부 가장 끝자락. 거대한 암벽이 솟아있는 불암산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버스는 불암산 아래로 빼곡하게 밀집해있는 상가와 아파트를 달리다 더는 바퀴를 굴릴 수 없는 마지막 종점에 다다른다. 종점에서 내려 가만히 보니 지금껏 버스를 타고 달려왔던 풍경과 조금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높은 건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마을 입구에는 생선을 파는 아저씨가 트럭을 세워둔 채 주민들과 흥정을 하는 중이다. 노란색 표지판에 쓰인 ‘연탄 은행’이라는 글자도 왠지 생소하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두고 꺾어진 골목에는 지난겨울 뜨겁게 타올랐던 연탄이 나뒹굴고 있다.  중계동 104번지였던 이곳은 지금까지 그 이름을 간직해 백사마을(104마을)이라고 불린다. “48년 전 나라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다 옮겨놨지. 그때부터 마을이 생겨났고.”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한 할머니가 운을 뗀다. 
 
  1967년 청계천, 용산 등의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은 정부의 개발 정책에 따라 지금의 백사마을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됐다. 당시 정부가 마련해준 것은 30평 남짓한 천막 하나였지만 이주해온 주민들은 그 안을 나누고 주변에 집을 지으며 살 방법을 마련해나갔다. 그렇게 엉성하게 만든 그들의 또 다른 판잣집이 모여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백사마을이 만들어졌다. 
 
  마을 입구에서 커다란 전봇대 하나를 가운데 두고 갈림길이 시작된다. 두 갈래 길에는 각각 하얀 현수막이 걸려있다. ‘빠른 개발을 위한 104마을 세입자 대책위원회 개소식’, ‘에너지 취약계층가구 전수조사’. 어렴풋이 이곳이 재개발 구역임을 짐작하게 된다. 지붕이 날아갈세라 타이어를 올려놓고 문은 임시방편으로 대충 매달아 놓은 듯하다. 20평 남짓한 임시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은 서울을 생각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와 꽤 멀어 보인다. 잘 알려진 벽화 마을인 ‘이화마을’과 같이 관광객들이 찾는 마을과도 그 냄새가 사뭇 다르다. 가끔 지나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집집이 키우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를 뺀다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한적하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높은 아파트와 희뿌연 공기만이 이곳이 서울임을 느끼게 한다.
 
 
 
  마을의 꼭대기로 향하는 오르막길에는 지붕이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집 주인의 이름과 빈집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흰 스티커는 이곳이 곧 철거될 곳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분위기는 조금 삭막하나 마을 곳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비탈길을 올라가는 길을 따라 연한 하늘색으로 칠해진 벽에는 아기자기한 그림과 함께 연대별로 마을이 거쳐 온 길을 적어 놓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마을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 두 손 가득 먹을거리를 사서 집에 돌아가곤 했지요. 그때는 시장이 밤늦게까지 정을 나누며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백사마을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때는 사람들로 붐볐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어르신들도 시종일관 밝은 미소로 방문객을 반긴다. “안녕하세요”하고 꾸벅 인사를 하면 오랫동안 같은 마을에서 살아온 사이처럼 되받아준다. 서울 어디를 가도 이런 미소와 인사는 받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곳에서 꽤 오래전부터 시멘트 가게를 하고 계시는 김학순(가명) 할머니는 잿물로 만든 비누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우유갑에 차곡차곡 담긴 비누에는 그녀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있다. “집 뒤에 조그맣게 있는 밭에 갔다 왔더니 힘드네.” 의자에 놓아둔 우유갑을 힘겹게 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입을 연다. “마을에 온 지 꼭 26년이 됐어. 환갑 때 이사를 왔으니….” 지붕이 낮은 그곳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벗 삼아 가게를 하며 오랜 세월을 꿋꿋이 견뎠다. 
 
  10년 전 이 마을로 이사와 혼자 사는 김복동(가명) 할머니도 볕이 좋은 날씨에 곱게 손빨래한 옷들을 널어놓았다. 재미있는 얘기를 부탁하는 기자의 말에 옆에 앉아있는 친구인 윤영숙(가명) 할머니를 소개해 준다. 윤영숙 할머니는 옆에 있던 판자촌에서 이사와 30여 년 전부터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이제는 손녀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재개발 얘기는 꾸준히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안 된 거야. 기약이 없어. 투기한 사람들도 다 망했고. 옆 마을은 이미 다 됐는데….”그렇다고 재개발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재개발이 된 마을에는 원래 집 주인들이 돌아올 방도가 없지. 값이 비싸진 집을 다시 살 돈이 없으니까.”씁쓸하게 이야기를 마친 윤영숙 할머니가 떠나자 김복동 할머니는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적적해진 할머니가 노래를 들으며 손뼉을 치는 소리가 골목길을 울린다.
 
  마을에는 이렇게 혼자 단칸방에서 하루를 보내며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어르신들이나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중 30년간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 장소가 있는데, 입구에서 발걸음을 얼마 떼지 않아 좌측에 큰 글씨로 ‘평화의 집’이라고 새겨진 문패가 있는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평화의 집은 일주일 중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맛있는 밥을 무료로 제공해준다. 큰 대문을 들어서면 자원봉사자분들이 “어디서 왔어? 대학생인가?” 하며 반긴다. 지금은 예순이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건강해 보이는 정채옥(가명) 할머니는 이곳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찾아와 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데서 절대 밥을 안 먹겠다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어느새 매일 점심시간에 보는 사이가 돼”라며 웃는다. 한남대의 임춘식 교수가 개인재산을 들여 평화의 집을 만든 게 시작이었으나 지금은 인근의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생까지 봉사활동을 온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서는 진한 사람냄새가 난다. 눈을 마주치면 피하기 바쁜 사람들이 아니라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마을을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이 마냥 흥미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 아픈 구석이 존재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는 그저 신기하고 오래된 곳이 아닌 주민들의 고된 삶과 추억이 얽혀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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