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보단 밤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밤이 되어야만 오롯이 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낮 시간 동안 갈고 닦은 그들의 지성과 끼는 중앙마루, 청룡연못 또는 의외의 장소에서 발휘되기도 한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나름의 고민을 가진 이들을 시민K라 부르겠다. 이들은 학교에 남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바쁜 일상에 치여
잊힌 전 연인

좋았던 기억만 남아
문득 생각이 난다


  PM10:30 

  로즈 데이와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5월의 많고 많은 기념일들을 지나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던 것은 팀플과 과제였다. 학생들은 팀플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밤이 늦도록 학교 이곳저곳을 헤맨다. 마땅한 장소를 찾을 수 없다면 자리 잡기에 가장 만만한 곳은 법학관 로비. 기자는 법학관 9층 로비 한가운데서 빈자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여학생과 마주쳤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법학관에 있나.
친구랑 밤새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과방에 가서 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른 사람들이 팀플을 하고 있지 뭐예요. 로비에 있는 테이블에서 해야겠더라고요. 원래는 24시간 영업하는 카페가 생겼다고 해서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인터넷도 연결이 잘 안돼서 커피만 사들고 다시 학교로 왔죠.

-과제를 해야 하는 건가.
아 전 자기소개서(자소서)를 써야 해요.

-취업준비생인가보다.
네. 지금 8차 학기 다니고 있어요. 제가 휴학을 좀 많이 했거든요.

-쓰고 있는 자소서는 어떤 기업에 지원할 건가.
일단 제 전공에 맞춰서 지원할 거예요. 요즘 취업문이 좁아서 힘들어요. 다른 분야의 기업들에도 지원서 넣어볼 생각을 하고 있죠.

-자신의 강점을 뭐라고 밝히나.
시장을 읽는 날카로운 눈. 근데 왜 취업이 안 될까요? 이렇게 날카로운데…. 시장을 보는 인사이트(insight)가 있다는 말이 취업 담당자에겐 많이 와 닿지 않나 봐요. 기자님이 물어보니 이제야 알겠네. 자소서가 부족했던 것 같네요. 저 울어도 돼요?

-단발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데 취업용으로 자른 건가.
원래 계속 긴 머리였는데 너무 많이 상해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냐고 물어보는데 전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상해서 자른 거예요.

-휴학을 오래한 이유는 무엇인가.
2년 전 여름 교환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에 있는 대학을 한 학기 동안 다녔어요. 그러고 나서  영국에서 인턴을 하느라 한 학기를 쉬었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취업을 걱정하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교환학생 준비하면서 공부를 많이 하긴 했죠.

-미국 어디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나.
아무도 모르는 주요. 웬만해선 한 번쯤 들어봤을 법도 한데 50개밖에 안 되는 미국의 주 중에서도 처음 들어 보실 걸요? 네브라스카 주요. 사람들은 알래스카랑 혼동하더라고요. 미국의 완전 정 중앙부에 있죠. 네브라스카 대학에 다녔어요.

-네브라스카 대학에선 무슨 전공이었나.
딱히 전공이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복수전공은 Love?(웃음) 농담이에요. 교환학생은 듣고 싶은 강의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거든요. 제 전공은 한국에서 많이 들어놨으니 미국에서는 좀 새로운 걸 들어볼까 했죠. 그런데 프랑스어가 5학점짜리로 매일 수업이 있더라고요. ‘재밌겠는 걸?’하고 이 과목을 들었어요.

-매일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끌렸다니.
매일 수업을 들으면 프랑스어가 많이 늘 줄 알았죠. 제가 워낙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해서요. 완전 무상식으로 갔다가 거기서 프랑스어 기초부터 배웠어요. 그때 잠깐 늘었죠.

-복수전공인 Love를 수강한 후기는.
사랑이요? 그때 만난 남자친구는 중앙대 학생이 아니었어요.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유학하던 한국인이었죠. 교환학생 한 학기동안 만났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을 떠난 후에 헤어졌어요.

-전 남자친구랑은 어떻게 지냈나.
되게 재밌게 지냈어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계속 붙어 다녔거든요. 그 대학이 있는 곳은 시골이라 딱히 할 건 없었어요. 상점이나 음식점들도 문을 일찍 닫아서 공원 같은데 주로 갔어요. 주변에 한국음식 파는 식당도 없었거든요. 같이 한국 음식 해먹으면서 놀았어요.

-타지에서 만난 연인이라 지금도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맞아요. 한 친구가 절 가만 보더니 아직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뭐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에요.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있을 때만 해도 사귀고 있었는데 영국 인턴까지 가면서 연락하기가 점점 힘들어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헤어졌죠.

-헤어지고 인턴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지 않았나는지.
괜찮아요. 대신 인턴을 했던 곳에서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한국인이 운영하는 영국 소재의 무역 회사였죠. 주로 악세서리를 취급하는 회사였는데 저는 헤어피스(Hairpiece)부서에 있으면서 주문이 들어오면 처리하고 납품한 물건이 배송이 잘 됐는지 체크하는 등 그런 업무를 봤어요. 클라이언트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도 하고요. 가끔 제 전공에 맞지 않는 카탈로그 만드는 일도 하긴 했어요.

-영국에서 인턴 할 때도 사랑을 만났나.
아니요. 대신 회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값진 인연을 많이 만났다고 생각해요.


  PM11:00 

  지금은 취업준비생이 되어 비록 늦은 시간까지 자소서를 쓰고 있지만, 몇 년 전 같은 시각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고 말하는 한 여학생. 기자는 그녀가 말해준 연애담을 되뇌며 팀플이 난무하던 법학관을 빠져나왔다. 청룡연못에선 영화학과 학생들이 밤 촬영을 하고 있었고 이윽고 도착한 중앙마루에는 펼쳤던 술자리를 정리하는 남학생이 보였다.

 

-오늘은 과제가 없었나보다.
아 예, 저 중앙마루 이번학기 들어 처음 와 봐요.

-지금 몇 학년인가.
2학년 2학기에요. 군대 갔다 와서 작년 8월에 복학했어요.

-복학하고 학교에 적응은 잘 했나.
아뇨. 1학년 때가 제일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적응이 잘 안 되네요.

-지금이 한창일 때 아닌가.
고민이 많아지네요. 벌써부터 졸업이나 취업이 걱정돼요. 외롭기도 하고…. 실은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제가 마음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헤어진 지 아직 한 달밖에 안됐거든요.

-마음이 많이 아프겠다.
그 당시엔 그랬죠. OT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헤어졌으니까 충격이 조금 컸어요. 그때 여자친구로부터 온 전화를 못 받았는데 헤어지자는 메시지가 딱 오더라고요.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진 않았나.
여자친구와 두 달을 만나다 서로 좀 소홀히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언젠가 이러다 한번 헤어지겠구나 생각했죠. 근데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으니 별로 변명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어차피 이 사람이 자기 입으로 헤어지겠다고 표명한 상태면 제가 나중에 다시 매달려서 사귀더라도 언젠가 이 감정이 다시 살아날 테니까요.

-연애경험이 많아 보인다.
그건 아니에요. 복학하고 처음 만난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만나게 된 사람인가.
춤추다 만났어요.

-혹시 클럽에서 만났나.
네. 제가 힙합을 좋아해서 강남지역에 있는 클럽에서 만났어요. 같이 클럽에 갔던 멤버 중에 갓 전역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클럽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그 친구를 위해 “재밌게 해주자!”하고 간 거였어요.

-클럽에서는 대체 어떤 식으로 대시(Dash)하나.
제가 일방적으로 다가갔어요.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는데 저 멀리 제 이상형에 가까운 한 여성분이 보이는 거에요. 친구들이랑 딱 새벽 5시까지 놀다 집에 들어가려 했는데, 그때까지도 저 여성분이 남아 있으면 대시하려고 했어요. 다행히도 그때까지 계속 남아 있더라고요. 근데 여성분 옆에 어떤 남자가 한 명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그 남자가 계속 눈에 거슬리는 거예요.

-남자친구였던 건 아닌가.
둘이 너무 재밌게 놀고 있길래 그 남자한테 가서 혹시 남자친구냐고 물어봤어요. 끝내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이 됐죠. 그럼 여성분한테 말 좀 걸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더라고요.

-춤을 추며 대시하나.
아뇨. 제가 춤은 잘 못 춰요. 힙합을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몸치여서 일단 전 여자친구한테 가서 ‘맘에 든다’고 상투적인 말을 했죠.

-전 여자친구의 어떤 매력에 반했나.
얼굴이 엄청 예쁘다기 보단 전체적인 느낌이 좋았어요. 제가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때 전 여자친구가 스키니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거든요. 또 하얀 셔츠에 단발머리였는데 정말 섹시해 보였어요. 제가 단발머리 한 여자를 진짜 좋아해요.

-전 여자친구와의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결국 소소한 것들이 추억으로 남는 것 같아요. 여자친구가 운전면허 학원을 다녀서 잠깐 못 본 적이 있었어요. 그래봤자 4,5일이었는데 연애 초기니까 그 4,5일도 길게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여자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갔는데 그때 여자친구가 텀블러를 선물해 줬어요. 제가 커피를 좋아하는데 제 소소한 기호를 알고 해준 거라 너무 고마웠어요.

-헤어지고 나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못 만났나.
아유 없어요. 지금 허지웅(무성욕자로 대표되는 방송인)처럼 돼가고 있어요. 요즘 여자 만날 생각이 전혀 안 들더라고요.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 받는 거라던데.
사실 학교 앞 새로 생긴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예쁘더라고요. 제가 카페에 가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카페에 자주 가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죠. 평소처럼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쟁반에 음료 말고 뭐가 하나 더 있는 거예요.

-시키지도 않은 음식이 있었다는 건가.
네. 머핀이었어요. 일단 경황이 없어서 ‘감사합니다’하고 받아왔는데 말 한번 못 걸어본 게 아쉬운 거 있죠.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줬을 것 같은데.
그래서 저도 확인해봤죠. 이게 재고가 많이 남아서 준 서비스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보다 2,3천 원 비싼 음료를 시킨 사람한테도 머핀은 없었어요.

-그럼 그린라이트의 가능성이 조금 보인다.
다시 가보려고요. 전에 한번 또 갔었는데 그땐 안 계셨거든요.

 한땐 정말 사랑했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시민K들을 만나봤다. 이들의 사랑이 다소 일회적이란 생각도 잠시, 지나간 인연을 마음속에 덤덤히 묻는 것이 오히려 멋져 보였다.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이수일과 심순애 식 연애보다는 속편한 이들의 연애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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