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소위 ‘지옥’으로 형용되는 대학 입시 체제를 넘어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다. 우리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와 유럽의 타 선진국들의 학교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등록금을 내면서도 계속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스펙, 취업 정보, 인맥 등 이점들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의 기대이익과는 조금 먼 이야기지만 본래 대학은 예로부터 진리의 상아탑으로 비유되어왔고, 그것이 바로 대학이 시작되고 융성하여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가 원래 피 터지는 입시를 거쳐 대학교에 온 이유도 지식을 탐구하기 위함이어야 바람직하다. 2014년, 중앙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이 과연 이 비유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또 우리는 왜 상아탑의 본질에 왜곡된 기대를 하고 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말의 유래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비평가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 Beuve)는 낭만파 시인인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의 시를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있다며 ‘상아탑에 홀로 틀어박혀 쓴 시와도 같다’라고 비판했다. 후에 상아탑이라는 표현은 속세를 떠나 지식과 예술에 몰두하는 경지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으로 점차 변화되었다. 즉, 대학교라면 마땅히 속세와 현실을 뒤로 하고 학문에 열중한다는 상아탑의 비유에 알맞게 학생들에게 전공과 관련 학문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탐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지식과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표현을 취업사관학교로 변질되어버린 오늘날의 대한민국 대학 체계에 빗대어보았을 때 부끄럽고 개탄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겠다는 명목 하에 실행되는 줄 세우기식 상대평가, 발전가능성을 운운하며 취업률 등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대학 구조조정, 학생들의 소위 ‘정치’ 활동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바쁜 대학 등의 현실은 대학의 시작과 본질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학생들도 속으로는 불만이 많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에 쉽게 저항할 수 없다. 오늘날의 어른들은 학생들의 한탄에 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며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저항하고 맞서 싸워라, 70,80년대 민주화를 이끌어오던 대학생들의 정신은 다 어디로 갔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대학은 이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하나의 커리어를 쌓는 정거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좋은 학점과 스펙을 쌓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진리를 탐구하고 토론하기보다는 교수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 적어 시험을 보고 점수를 확인하고 자신의 학점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구걸한다. 저항의 마음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영수 선배를 탄압하고 퇴학 이후에도 감시한 대학교, 대자보를 허락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폐기하는 대학교를 바라보며 조용히 누그러뜨린다. 대학은 어느새 자본과 권력의 첨병이 되었고 학생은 학교와 취업전선이라는 장벽 앞에서 기꺼이 노예가 되었다.

  학생들이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들 개개인이 상대하기에 대학은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렸다. 괴물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을 원망하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저항의 시작은 ‘현 세태가 나쁘다고 믿는 확신, 언제든지 저항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품고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저항하지 못한다고 좌절하지 말고, 저항의 때를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또 지내는 것, 저항의 적기가 왔을 때 언제든지 깃발을 들고 투쟁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생활해나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21세기 취업의 상아탑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진리의 상아탑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오늘도 뜨거운 분노를 안고 살자.


박민석 학생
사진전공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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