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치유”라는 “힐링”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사용됨에도, 주류를 가진다. 대중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여기는 패널이 TV든 강연이든 등장한다. 그리곤 다사다난한 인생사 이야기를 말한다. 힐링은 이미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 원인은 사회적일 수도 있고, 개인적일 수도 있다. 패널도 아픈 순간을 한번 즘은 겪은 사람이다. 그럼 대중은 여기서 무엇을 얻으려는가? 대중은 패널의 이야기와 자신의 스토리와의 어떤 유사점을 탐색한다. 패널이 어떻게 문제를 극복했는지 확인하고, “나도 저렇게 해볼까?” 혹은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 반응하며, 교훈을 얻어가려 한다. 또 도무지 감감하던 인생의 힌트를 그 간접경험에서 찾았다 여기기도 한다. 이 작은 성취는 위로와 안정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보면 힐링은 그닥 능동적이고 역동적이진 않되, 분명 대중에 안정을 일시적으로 제공한다. 그렇다면 힐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안정이며, 인생이란 음악에선 ‘약’의 박자에 상응한다.

  이 지점을 비판하며, 대중에게 새삼 재등장한 코드는 “반성”이다. 직설화법으로 유명한 철학자 강신주는, 힐링을 혐오한다. 힐링은 단지 남의 이야기다. 각자는 배경이 다르다. 이 점을 간과한 힐링은 그에겐 미봉책이다. 물론 사회모순은 아픔의 공통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이를 어찌 극복해야할까? 그는 답한다. 개개인이 주체성을 회복한 뒤,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라고. 그는 개인의식변화를 사회변혁의 선조건으로 주문한다. 내담자들이 적어낸 고민들을 공개적으로 읽고, 해당 내담자에게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리곤 내담자가 자기기만 해왔는지 모를 진짜 욕구들을 맨얼굴처럼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당신 위치는 여긴데, 어떤어떤 선택들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기서 대중은 잊었던 가치를 상기해낸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삶의 주인은 자신이었다는 사실과 선택지를 확인하는 냉정한 반성적 진단은 ‘중’의 박자에 상응한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대중도 있다. 이들은 “혁명”을 갈구한다. 강신주는 일부러 냉장고처럼 포기하기 힘든 친숙한 사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적이 있다. 이런 소재로도 잘 반성해보면, 찾아낼 수 있는 사회적 모순들이 있다는 것이다. 또 냉장고를 버릴 수 있냐고 대중에 묻는다. 물론, 실제 냉장고를 버리라는 맥락은 아니다(웃음). 그저 사회적 모순에 얼마나 친숙해졌고 반성과 선택의 자유에 괴리돼 있는지 매개물로 드러낼 뿐이다. 정치적 좌파들은 이 지점을 비판한다. 그래서 당신은 냉장고 버렸느냐고. 물론 그들도 진지하게 실제 냉장고를 버리라 요구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이 변혁에 대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참된 반성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변혁을 개인인식변화의 선조건으로 뒤집는다. 사회모순에로의 집중은 “정의와 평등”이란 가치에 대한 강한 갈구다. “평등할 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들의 신조는 이를 잘 대변해주며, ‘강’의 박자에 상응한다.

  힐링, 반성, 혁명... 모두 인간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인간은 때론 쉬어가고 싶은 안정을 원하고, 때론 냉정한 반성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길 원하며, 부조리에 대한 강한 분노는 정의와 평등의 실현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인간이 쉽게 포기할 수 있는지, 또 이 중 어떤 가치가 특별히 우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 가치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나는 조심스레 이렇게 암시해본다. 이 가치들은 모두 서로간의 공감이라는 오선지 위에 표현되고 있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오선지 위의 박자들의 조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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