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대 농촌계몽운동이 모태
80년대 농민과의 연대에 방점

현재 중앙대 농활지 두고 단과대
농활의 방향에 해석의 차이 때문

  바야흐로 농활의 계절입니다.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학생들은 빽빽한 도시에서 벗어나 고창과 충주로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학생들의 활동은 농사를 도우는 일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봉사를 넘어 농촌의 삶을 몸소 느끼는 것이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서의 의미기 때문이죠. 뚜렷한 의미는 과거보다 퇴색됐지만 여전히 농민과 학생의 징검다리가 되고 있는 농활. 그 시작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농활의 기원은 1920년대 농촌계몽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낙후된 농촌을 계몽하고자 했던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1935년 발간된 심훈의 ‘상록수’를 보면 뜨거웠던 농촌계몽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학이 이루어지는 마을 자치 회관은 밤이 돼도 발 디딜 틈이 없고, 농우회를 조직한 청년들은 두 손을 걷어붙이고 농촌 부흥에 나서죠.


  1960년대 후반부터 대학생들의 농활이 눈에 띄게 활발해집니다. 바로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소외된 벽지를 찾아 도시와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목표였는데요. 음악, 미술 등의 정서교육부터 가방 뜨기, 가계부 정리와 같은 생활밀착형 교육, 영화상영이나 보건상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농활의 성격은 좀 더 능동적으로 변화합니다. 봉사와 희생이 강조됐던 기존의 농활은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죠. 이 시기 농활의 의미는 단순히 주는 자와 받는 자라는 관계설정에서 벗어나 농민들과 연대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습니다. 농촌사회의 현실을 농민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초석이 되죠.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점 중앙대 학생들의 농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총학생회(총학) 차원에서 전 단과대가 함께 가던 과거의 농활과 달리 지난해부터 일부 단과대들이 농활지를 바꿨다는 것입니다. 올해 서울캠의 경우 인문대, 자연대 그리고 사회대 일부 학과는 충주로, 나머지 단과대와 총학은 고창으로 가게 됐습니다.


  지난해부터 서울캠 총학은 농활 경로를 변경했습니다. 서울지역대학생연합에서 농활지를 배정해주는 기존 방식은 3년마다 지역이 바뀌기 때문에 지속적인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지자체에 연락을 해 농활을 기획했습니다. 고창의 경우 학생처의 ‘Farm Stay Ac tivity’가 진행됐던 곳으로 지자체와 접촉하기 위해 총학이 학생지원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이에 일부 학과들은 농활의 방향을 달리했습니다. 농민회가 아닌 지자체와 접촉하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농활이 이뤄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입니다. 그들은 농민회에 직접 연락을 해 농활을 추진했습니다. 지난해 총학과 함께 농활을 떠났던 자연대는 올해 충주로 농활지를 변경했는데요. 자연대 노소진 학생회장(물리학과 3)은 “지난해 농활은 농민과 교류하는 것보다 농사일을 돕는 봉사활동에 치중돼 있었다”며 “단순한 노동력 활용이 아니라 농촌의 현실에 공감할 수 있는 농활을 위해 충주로 가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총학 농활대와 떨어져 충주로 간 학과들은 학교로부터 버스 지원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농활 지원을 담당하는 학생처가 총학생회 주관의 사업만을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면서 농활의 모습도 과거와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농활의 취지는 오늘날도 이어져야 한다는 것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농촌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자 했던 지난 세기에서 농활이라는 단어의 깊이가 가벼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변하는 것 와중에 바뀌지 말아야할 중요한 가치도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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