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보듬어주는
  숲의 평안함
 
  나 자신을 비웠을 때 
  숲은 꿈을 채워준다
 
  삶에는 두 가지 슬픔이 존재한다. 삶의 궤적과 함께하면서 항상 기저에 내재해있는 통시적인 슬픔과 갑작스럽게 일상에서 발현되는 공시적인 슬픔이 그것이다. 통시적인 슬픔은 나의 삶과 함께하기에 나를 따라오는 슬픔이고 공시적인 슬픔은 특정 순간에 발현되기에 내가 따라가는 슬픔이다. 나의 삶을 따라오는 슬픔은 깊고 내가 따라가는 슬픔은 넓다. 요즘 우리들 모두가 느끼는 경계 없는 무력감에는 넓은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 수면 아래 가라앉은 아이들과 수면 위로 떠오른 추악한 사회의 병폐들에 우리 모두가 정신적인 상을 치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끝내 스스로를 치유 해야 한다. 죄책감에 웃고 떠드는 것이 미안해도 결국은 새살과 새마음으로 더 건강하고 힘차게 살아가야만 한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보다 더 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위로받듯이 우리는 자연의 품에 안겨 위로 받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북서울꿈의숲’은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자연과의 생동감 넘치는 첫 포옹
  서울에서 5번째로 크다는 녹지공간인 이곳의 동문에 들어서면 ‘칠폭지’라는 연못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 칠폭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7개의 폭포가 있는데 폭포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바로 앞 아스팔트 도로와는 다른 공간임을 느끼게 해준다. 칠폭지를 비롯해 북서울꿈의숲에는 흐르는 물이 많다. 칠폭지의 폭포와 이곳으로부터 출발하는 실개천들은 숲 곳곳에서 정적으로 고인 물에서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꿈의숲이 인공적 공간임에도 그 품에 처음 안겼을 때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단절에서 생각에 잠기다
  칠폭지를 지나면 완만한 토지 위에 자리 잡은 숲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크고 작은 나무와 길이 엮이면서 시골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초입부에는 ‘창녕위궁재사’라는 고풍스러운 목조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조선 23대 왕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의 재사이다. 재사란 과거 유생들이 기숙하면서 공부했던 곳을 의미한다. 숲이 도시와 대비되며 공간적 단절을 만들어낸다면 창녕위궁재사는 숲 공간의 시간적 단절을 만들어낸다. 숲을 걷는 것이 좋은 것은 바깥과는 단절된 공간에서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녕위궁재사의 집 뒤편은 조용히 생각하며 시름에 잠기기 딱 좋은 공간이다. 기와가 만들어내는 그늘과 경계에 심어져 있는 대나무가 한적하면서도 독립된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치유에도 정리가 필요하듯 생각에 잠기는 것도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호수에 슬픔을 한가득 내려놓으며 
  재사 뒤에 있는 대나무길을 걷다 보면 도시에서 보기 힘든 거대한 호수가 나온다. ‘월영지’라고 불리는 호수는 달을 비춰 보는 연못이라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밤에 뜨는 달은 예로부터 애틋함, 그리움 등을 상징한다. 실제 밤이 되면 커다란 달을 품을 것 같은 이 거대한 호수는 사람들의 슬픔을 다 받아 줄 것처럼 깊고 진중해 보인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석교와 오른편에 위치한 정자인 애월정에 가보면 월영지를 더 가깝고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바깥에서 느꼈던 고민과 슬픔을 숲길 안에서 정리했다면 이곳 월영지에서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월영지 근처에도 나무로 우거진 숲길을 만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것과 숲을 걷는 것은 고지를 정복하는 것과 에둘러 걷는 것의 차이가 있다. 숲을 걷는 것 즉 에둘러 걷는 것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가끔씩 부는 단 바람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식을 만큼의 완만한 경사를 걷고 또 걸으면서 해결되지 않는 생각들을 쌓고 또 쌓는 과정이다. 쌓이다 보면 결국 무거워서 내려앉기 마련이다. 숲 중턱에 위치한 이 거대한 호수는 쌓이고 쌓인 생각들을 내려놓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거진 나무와 풀들을 걷다 월영지 근처 벤치에 앉아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드넓은 광장에서 하늘에 몸을 맡기다
  월영지 너머에는 이와 대비되는 확 트인 잔디광장이 있다. ‘청운답원’이라 불리는 이 광장은 서울광장의 2배 정도 크다. 실제 월영지 위에서 청운답원을 바라보면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녹색 바다를 보는 듯하다. 완만한 경사라 누워 있으면 편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숲에서 쌓고 월영지에다 내려놓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운답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비워냈으면 그저 넓은 광장에서 높은 하늘을 품는 것이 최고이다. 아무리 큰 슬픔과 아픔이라 해도 그보다 넓은 품에 안기면 그만이다. 
 
  모든 슬픔을 품어줄 듯한 월영지와 홀가분해진 몸을 하늘에 맡길 수 있는 청운답원은 그 의미와 기능 면에서 여러모로 대비된다. 그 한가운데에는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데 이곳에 앉아 월영지와 청운답원을 한눈에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그 묘한 경계에 앉아 잠깐 땀을 식히는 것만으로도 상처 한구석에 새살이 돋는 것 같다.
 
숲의 마지막은 결국 꿈이다
  어느덧 완만한 경사의 끝 부분에 도착하면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어린이 놀이터, 문화광장, 다목적 광장 등 다양한 놀이시설들이 있는데 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어린이들 현장학습 나온 학생들까지 모두 뛰놀면서 숲의 생기를 더한다. 사람들은 숲을 걸으며 월영지를 내려다보고 청운답원에 몸을 맡기기도 하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듯 편해 보였다. 오른편에 위치한 전망대를 올라가면 근처 서울 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숲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풍광은 없다.  
 
  하지만 광장 오른편 구석에 위치한 ‘희망의 숲’으로 끝을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 있다. 희망의 숲은 실제 숲이 아니라 조형물이다. “자연을 그리는 마음으로 내 인생을 사랑하길”, “우리가족 사랑해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는 강직한 친구,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  나무로 만들어진 조형물에는 사람들의 그림과 글을 담은 작은 유리타일들이 모자이크처럼 붙어 있다. 유리타일에는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과 다짐이 가득했다. 이만큼 숲을 명료하고 간결하게 느낄 수 있을까. 숲은 결국 꿈이다. 꿈의 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도록 하는 이 의미 있는 조형물에서 치유와 휴식이라는 걸음걸음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숲에 꿈이 있다면 숲이 비운 곳에 꿈을 채우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픈 것을 이겨내려고 숲을 밟았을 때, 그리고 그것에 치유 받았을 때 우리가 꿈을 꾸는 것만큼 멋진 결말도 없다.
 
 
■교통정보
동문 : 지하철 1호선 월계역 2번 출구에서 
       147번버스 환승
서문 : 4호선 미아삼거리역 2번 출구에서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