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론, '국민적 대통합' 이유들어 … 대선 득표전략에 불과

얼마전 이회창 대표가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김대통령에게 건의
했으나 툇짜를 받았다. `대통합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 이대표는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이 이미 2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한만큼, 이들에 대한 용서를 통
해 국민적 대화합을 이루고 우리 모두가 미래를 향해 함께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대중 총재조차 추임새를 넣었다. 김 총재가 9월 2일자로 발행된 `뉴스메이
커'와의 인터뷰에서 "그분들이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선 안된다"고 운을 띄운 다음, 전.노씨의 `사과와 반성'이란 종전의 사면
조건을 철회하면서 `조건없는 용서론'을 꺼내었다. 김 총재가 사면의 빗장을 먼
저 풀고 나왔다. 대선을 앞두고 두사람 모두 `무조건 사면론'으로 손뼉쳤다.

게다가 "뇌물을 바친 재벌 총수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
치는 잘못된 행위"라는 야당 총재의 너스레까지 있었다. 드디어 정부는 지난
9월 30일 재벌 총수들에게 특별사면과 복권을 실시했다. 이어서 김현철씨의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이모두가 전.노 사면의 예정된 전주곡(?)이다.

이 지점에서 외국의 두 대통령이 일구어낸 `사과와 화해 정신'을 떠올릴 필요
가 있다. 지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혹독한 인종 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
에서 비롯한 갈등과 대립을 차분하게 극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델라 `흑인'
대통령의 지도력과 전직 `백인' 대통령인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보여준 사과
와 화해의 정신 아래 진행되고 있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작업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지난날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우선 `진실'을 밝히고, 사법부에 그 처리를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 진실을 밝히
는 작업은 일시적인게 아니라 줄곧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관련자들이 참회하
고 `사과'하면 사면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데 클레르크가 해 온 역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증인으로 참석했
다. 그는 "국민당이 과거에 저질러진 많은 잘못을 인정하며 진실로 뉘우치고 있
다"며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화해 정신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전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휠체어를 탄 4명의 흑인 노인들에게 진
정으로 머리 숙여서 사과했다. 왜 그랬는가. 32년 초 앨라바마 주에 있는 투
스키지 대학의 의학 연구실에는 가난한 흑인 농부 3백99명이 모였다. 생체
실험은 이렇게 시작됐다. 실험 종목은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까지 최악의
질병이던 매독이었다. 이른바 `투스키지 실험'으로 불리는 이 실험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매독균을 주사한 다음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언제까지 생존하는
가를 지켜보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 끔직스러운 것은 페니실린의 발견 등 매독 치료제가 잇달아 개발됐지만, 매
독균 감염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는 종래의실험 목적을
달성키 위해 실험을 40년씩이나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72년 AP통신이 이
사실을 폭로했다. 그동안 3백99명중에서 28명이 매독으로, 다른 1백명이 매독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40명의 부인들이 같은 질병에 감염됐고, 2세중에도 매독
환자가 19명이나 나왔다. 뿐만이 아니다. 클린턴은 정부의 사과가 이렇게 `늦어
진' 점도 사과드린다고 거듭 잘못을 인정했다. 74년 미국 정부는 이 문제가 불거
지자 생활 안정비로 1천만달러를 주고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심지어 흑인
들이 치료를 자원한 것이라고 줄곧 강짜를 놓았다. 결국 미국 정부가 솔직하게
사과하기까지 무려 2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36년전에 있었던 우리의 경우를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위한 준비회담의 성격을 지닌 한일회담에서 고
서, 미술품, 정화준비금(正貨準備金) 등의 반환과 평화선의 승인 그리고 이
른바 한일합병조약의 파기를 포함한 최소한의 요구를 내놓았다. 그러나 박정
희 대통령은 1961년 쿠테타로 탈취한 군사 정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미국
과 일본의 지지를 구걸했다. 특히 정치 자금과 경제 발전 그리고 근대화의
정치적 구호에 내용을 넣기 위해서 특히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한일협정을 관철하기 위해 6월 1일에 외국인 기자단과 인터뷰했다. "일
본인이 과거를 사죄하고 그 이상의 성의로 회담에 임해야 한다는 얘기는 지금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옛것은 물에 흘려보내고 국교 정상화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어서 박대통령은 곧장 방일 친선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는 친일파였다. 박대통령의 이같은 말이 지금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전.노 사면의 담론과 짝을 이룬다. 한쪽은 `국교 정상화
'를 내세워 국가의 자존심과 국민의 긍지를 유린했고, 다른 두쪽은 `대통합
'과 `대화합'을 내걸어 법과 사회정의를 짓밟고 있다.사면 문제에 대해선 여
야의 대선 후보가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한쪽은 병역 문제로 대쪽같은 이
미지를 먹칠했고, 5.6공의 보수 인사를 주변에 깔고 있다. 그 밥에 그 나물
이다. 다른 한쪽은 수십년간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다. 하지만 관변단체
를 방문했고, 박정희 무덤에 분향했다. 노대통령으로부터 더러운 돈을 자그
만치 20억 받았고, 비자금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정치 지향
점이 사뭇 다른 `유신 본당'과 아랫배를 맞추었다. 정치적 야합이다. 게다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반민주적 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영입하는데 혈안이 되
어 있다.대권은 `아편'이자 `악마'이다. 평소에 멀쩡한 사람도 대선 앞에서
이렇게 중독되고 대선 귀신에 씌여 정신을 못차린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싸워온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정치권의 움
직임을 심각한 모멸로 받아 들일 터이다.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광주 항쟁의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명관 원로교수가 `서울의 찬가, 서울의 애가'에
서 한 말이 약발을 받을 것 같다. "광주의 처절한 기억이나 업적, 그리고 설화는
결코 지역적인 것이 아니고 민족적이고 인류적인 것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것
을 왜소화시켜 지역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려고 하는데 오늘날 한국의 비극이 있
다. 그런 역사 인식을 지역주의, 부족주의가 강요하고 있으며 그것은 민족적으
로 공유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전.노씨는 12.12사태와 5.18에 관련해서 받은 훈장과 각각 2천억원이 넘는 추
징금을 내고, 국민들에게 솔직히 5.18진상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사면이다. 그게 바로 순리라는 말이다.

박영근<문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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