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歌), 무(舞), 악(樂)의 균형에 대해 가르침 받으며, 전통무용은 가장 한국적인 미를 띄어야 한다는 예술혼을 갖고 사는 무용인이 있다. 그 예술혼은 수십 년간 한국적인 얼로 빚어낸 안무를 창작하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무대를 연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채향순 동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봤다.
▲ 사진 박가현 기자
 
 
한국무용은
가(歌), 무(舞), 악(樂)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한국적인 모태에
동적인 움직임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지난 겨울 채향순 동문은 각종 무용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다시금 무용계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무용대상 시상식에 출품한 <사당각시>는 대한민국무용대상을 안겨줬고 직접 안무를 춘 승무로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건 그녀의 안무가 전통과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제자들의 안무연습 지도에 한창이던 그녀가 반갑게 기자들을 맞았다.
-상복이 넘치는 한해였다.
“작년 12월에는 한국무용협회에서 주최하는 ‘2013대한민국무용대상’ 시상식에서 <사당각시>란 작품을 무대에 선보여 대상을 수상했다. 작년 10월에 출전한 제21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는 직접 승무를 선보여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사실 출전하기 전 늦은 나이에 직접 무대를 선다는 게 좀 두려웠다. 40대 때부터 직접 안무를 추기보단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더 신경을 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용인으로서 본질을 살짝 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출전을 불사한 이유가 있다면.
“다들 명인, 명무라고 불러주시는데 입상하지 못했을 때 내 명예에 먹칠이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도자로서 끝이 없는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상한 <사당각시>는 어떤 작품인가.
“기본적인 줄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사당각시 연이와 도망주 두우의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랑이야기가 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작품의 제작방식이 궁금하다. 
“남사당패의 6개 종목인 풍물놀이, 대접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탈놀이, 꼭두각시 놀음을 무용으로 변형시켜야 하다 보니 각각의 이미지에 상징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단순한 움직임의 나열이 아니라 6개 종목을 입체적인 동작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채향순 동문이 지금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기까지는 무용인이 되기 위해 오랜 교육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했다. 그녀가 현재의 예술적 역량과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무용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는 걸 멈출지 모르는 꼬마였다. 그 당시 어머니가 그런 내게 무용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6살 때 나를 대전 국악원으로 데려가셨다. 국악원에서 본격적으로 무용인생을 시작했다.”
-집안에서 진로를 많이 지원한 것 같은데.
“무용인이 되는 걸 어머니가 장려하신 것도 있지만 무용수였던 이모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국악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용하는 걸 심하게 반대하셨다. 춤을 추면 기생이 된다는 인식이 있어서 아버지는 내가 기생이 될까봐 걱정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용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휩쓰니 아버지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를 뒷바라지 해주시게 됐다.”
-무용인으로서 꿈이 구체화되던 시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학창시절 나를 가르쳐주셨던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인간문화재가 되셨던 분들이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들 같은 인간문화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런 선생님들의 뒤를 바라보며 줄곧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악예술학교에서의 배움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은데.
“가무악의 균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는 국악예술학교에서 무용뿐만이 아닌 국악의 기본적인 이론까지 배울 수 있었다. 가무악을 동시에 가르치는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니 지금도 작품을 창작할 때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신경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학창시절 그런 학교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쯤 그냥 무용에만 전념하는 무용수가 됐을 것이다.”
-졸업 이후 어떤 생활을 보냈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실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박귀희예술단의 단원이 되어 해외순회공연을 다녔었다. 장구와 가야금 같은 악기를 다룰 줄 알면서 노래와 무용에 유능한 15명의 정예 무용수들로 구성된 세계 투어 공연단이었다. 공연단원들과 함께 세계 각국 순회공연을 통한 무대 경험을 쌓으면서 무용인으로서의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4살 때 강남에 무용연구소를 차려 몇 년 간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무용학원을 운영하면서 더욱 전문적인 국악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뒤늦게 대학 진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용수들에게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제대로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다. 음악을 공부하기 전에 나는 단순히 안무를 짜고 춤을 추는 사람이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다 보니 내 안무에 어떤 장단으로 음악을 깔아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무용인이라면 자기 안무에 어떤 음악을 넣어야 할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필요성을 느껴서 27살의 늦은 나이에 중앙대 국악과 84학번으로 입학했다.”
-어떤 학부시절을 보냈는가.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다. 학교에서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국악공부에 열중이었다. 본업이 무용이어도 한국무용은 국악 속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무용은 무조건 국악과의 조화와 함께 이뤄져야 된다는 생각에 국악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학부시절로 기억된다.”
 
 국악예술학교 때부터 학부시절까지 가장 아름다운 한국무용을 창작하기 위해선 국악에 대한 이해가 겸비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채향순 동문. 그녀는 졸업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건 무용단을 창립하여 창작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중앙무용단을 통해 수많은 작품을 선보여 왔던 채향순 동문의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채향순중앙무용단은 어떤 한국무용을 추구하는가.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추구한다. 한국의 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안무와 음악을 곁들여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전통만을 고수하진 않는다. 스승님들에게 배운 전통을 그대로 살리기보다는 대중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질만한 무용안무를 창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무를 짤 때 어디서 영감을 얻는가.
“스승님들께서 한국무용은 가장 한국적인 모태에 토대를 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용인으로서 교육을 받는 내내 그런 가르침만을 듣다보니 안무의 동작 하나하나에 가장 한국적인 얼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중앙무용단을 통해 다양한 순회공연도 선보여 왔다.
“국악원에 다녔을 때부터 해외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선보였던 공연들이 다 합쳐서 3,000번 이상이라고 하더라. 국악원에서부터 지금의 무용단까지 수많은 순회공연을 다니다보니 어느새 공연을 3,000번 이상 선보이게 됐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순회공연이 있다면.
“무용단 자격으로 매년 군악페스티벌 <타투>에 참석한다. 그중 7년 전에 참석했던 <타투>에서 풍고춤을 선보였는데 기립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때 지원금이 모자라 소품을 만들 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소품 없는 안무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 만들었던 작품을 선보인 뒤 외국인 관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박수를 받고 제자들과 같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애착이 남는 작품도 있을 것 같은데.
“서울예술단에 있을 때 만들었던 <물의 소리>춤-연신풍장이란 작품이다. 무용수 9명이 무대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전혀 빠져나가지 않은 채 앉아서 또는 서서 춤을 추고 두드리는 춤이다. 최신작으로는 재작년에 만들었던 <도리화>와 <사당각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더욱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
-다양한 작품을 하면서 무용인이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을 것 같다.
“예술과 인성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무용인으로서 가무악에 대한 이해나 국악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절에 대한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 한국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적인 가치에 대한 예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생활적인 측면에 있어선 제자들을 엄하게 지도하는 편이다. 한국무용을 한다는 사람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다거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행동은 지양하는 게 맞지 않은가.”
 
 가무악의 조화와 가장 한국적인 안무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채향순 동문이지만 전통과 대중성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전통무용에 대한 그녀의 고민은 줄곧 이어져왔다. 한국무용이 한걸음 나아가기 위해선 온고지신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전통을 모르고 한국무용을 창작할 순 없는 것 같다.
“한국예술에서 전통은 기둥과도 같은 가치다. 기둥이 삐뚤어지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한국무용은 전통이란 기둥이 튼실해야 발전할 수 있다. 요즘은 전통적인 토대를 멀리하고 창작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창작을 하는 건 좋지만 우리 색깔에 맞춰서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심지어 일부무용가들은 한국무용창작 작품에서 일본이나 중국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 춤사위와는 뿌리가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하면 우리의 본질을 무시하는 행위가 돼버린다. 하지만 전통만을 고수할 수만은 없는 것도 고민이다.” 
-전통무용이 대중문화와는 다소 격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전통만을 고수하는 건 우리 전통을 박제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통을 바탕으로 어떻게 대중성을 겸비할지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을 보면 끊임없이 현시대의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한다. 전통만을 강조하다보면 젊은 관객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전통을 토대로 젊은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안무를 창작해야 한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 같은데. 
“관객들의 흥미를 가장 크게 유발할 수 있는 건 동적인 움직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작을 좀 더 동적으로 만들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대중의 시각을 자극할 수 있는 무용의 동작에 변화를 줌으로써 대중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통예술이 대중과 가까워지려면 한국예술인들이 그만큼 지루하지 않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중도 그만큼 우리의 작품을 관람해야 한다. 전통예술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내 생명같이 아낀다. 중앙대가 있어서 나란 사람이 있다. 사람들에게 명무란 칭호로 불릴 수 있기까지 중앙대가 큰 도움이 되어왔다. 그렇기에 중앙대는 내가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중앙대 국악과를 나온 학생들이 국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훌륭한 무용인들을 만드는 것이 내가 중앙대에 보답하는 길이다.”

한국무용의 모태
 한국무용의 원초적 형태는 국가적 의식 끝에 있는 축제의 흥이 구체화되어 춤사위의 멋으로 승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이러한 한국무용의 특성은 변형되었다. 
 변형되고 정형화된 한국무용이 궁정무용이다. 궁정무용은 춤의 테마를 동작이 아니라 노래로써 설명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춤의 가락은 우아하고, 선이 고우며, 몸가짐이 바르고, 동작의 변화가 적어 다양하지 않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궁정무용과 함께 한국무용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민속무용은 한국무용 고유의 원형을 살리고 중국의 무용을 흡수하고 소화해서 경쾌하고 변화무쌍한 무용으로 발전했다. 민속무용은 원시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각종 제사와 서민대중이 즐겨하는 세시풍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발전해왔다. 
 가면무용은 가면을 쓰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여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탈을 쓰고 춤을 추며 놀이하는 탈춤이 대표적이다. 또한 의식무용은 불교 의식과 문묘·종묘의 제사에서 추는 춤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무용의 새로운 형태로 떠오른 창작무용은 전통무용의 형식이나 현대무용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창작되는 새로운 무용을 의미한다. 자기의 감정과 사상을 예술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한 무용이라 할 수 있다. 발레와 같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구성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표현 형식을 구성하고자 하는 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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